2012년 04월 12일
죽은 자의 눈물




# by | 2012/04/12 22:45 | comics | 트랙백 | 덧글(0)




# by | 2012/04/12 22:45 | comics | 트랙백 | 덧글(0)
# by | 2012/04/06 21:45 | comics | 트랙백 | 덧글(0)
‘퓨처 워커를 분석해보자’를 쓴 이후로 1년 정도가 지났고, 그 1년 사이에 ‘퓨처 워커’가 양장판으로 새로 단장되어 나왔다. 하지만 이미 있는 책을 다시 산다는 것은 적어도 내 머릿속에선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친필사인이 강한 유혹을 불러일으키지만, ‘폴라리스 랩소디’의 양장본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굳이 사인을 다시 얻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퓨처 워커를 분석해보자’를 지금 썼다면 좋은 타이밍이었을 텐데) 사인이 적힌 ‘퓨처 워커’는 아마도 x대입구역 근처의 북x통에서 파는 것 같으니 혹시 구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쪽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그런데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러두어야 할 점이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를 분석함에 있어 ‘피를 마시는 새’의 도움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아예 ‘피를 마시는 새’를 보지 않고 이 글을 썼으면 한 작품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그건 이미 늦었고, 사실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사이에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드래곤 라자’와 ‘퓨처 워커’ 사이에서보다 주제의 연계가 더 눈에 띈다. 이미 포착한 사실을 무시해가며 분석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이 글을 씀에 있어 ‘피를 마시는 새’의 인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타자(打者)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뭐 어쩌겠는가.
1. 카시다 암각문 채우기
작품의 맨 마지막을 담당하고, 또한 번외로 떡밥거리까지 제공하여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는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암각문의 대부분이 용인에 대한 서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지만, 마지막 문장에 와보면 이 글이 용인의 예를 통해서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암각문에서 용인은 사람을 정의함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고 명확한 예시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끝까지 읽은 시점에서, 우리가 암각문의 마지막 문장을 직접 채워보려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의 선택은‘미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만족스러운 답인 것 같진 않다. 작품 속에서 비아스나 갈로텍, 케이건과 같은 인물은 사람의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좋은 보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례 또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증오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랑도 보여주고 있다. 또는 그 둘이 아닌 다른 수많은 것들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로선 무리다. 그렇다면 다른 후보는 무엇이 있는가? 打者의 작품을 충분히 많이 접해본 이라면 당연히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만한 후보가 있다. 타인. ‘드래곤 라자’, ‘퓨처 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등의 작품에서 打者의 인간은 항상 상보적인(complementary)존재적 위상을 가진다. 사람은 ‘나를 위한 나’뿐만 아니라 ‘타자(他者)를 위한 나’로도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나의 다른 글 ‘폴라리스 랩소디를 분석해보자’에서 인용된 ‘조이스와 바흐친’ 부분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빈칸에 ‘타인’을 넣으면 카시다 암각문의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작품에서 용인의 예민함은 모든 방면에 있어 발휘되는 것 같지만, 역시 두드러지는 것은 ‘받아들임의 극대화’이다. 어쨌거나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우선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용인은 가장 먼저 인식하고, 가장 강하게 인식한다.용인에게 있어 ‘흘려들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에 가장 먼저 반응하고, 가장 강하게 반응한다. ‘반응’이라는 점을 주목하자.결국 용인이 아닌 사람과 용인이 만나면 능동적인 주도권은 용인에게 있지 않다. 용인이 아닌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자각하기도 전에 용인이 알아서 ‘반응’할 테니까. 결국 용인은 한 자아에 침투해 있는 타인의 존재를 가장 명확히 예시할 수 있는 본보기이다.
그러나 다른 답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일 수 있겠다 싶다. 어쨌든 즐길 거리는 많을수록 좋다. 또한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타인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사람에겐 ‘타자를 위한 나’도 있지만, 역시 ‘나를 위한 나’의 자리도 있는 것이다.그러니 ‘타인’도 만족스러운 답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말로 빈칸을 채울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을 통해 내 나름대로 생각해낸 답을 하나 제시해 보고자 한다. 내가 제시할 답이 만족스러운 답이라고 나 스스로를,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이 글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될 것이다.
2. 고착 – 남매, 시간의 역류, 케이건 드라카
‘눈물을 마시는 새’ 4권엔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바로 작품에 대한 打者의 직접적인 생각이 담긴 용어사전(?)이다. 작품을 해석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는 이 길잡이를 이 글에 끌어다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용어사전 중에서도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항목이 무엇일까. 내 생각엔 ‘남매’ 항목인 것 같다.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기도 하고, 가장 직접적인 打者의 논평이 곁들어 있기도 하다. 그곳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매들은 유난히 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케이건-극연왕은 서로가 가진 결코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던 한 순간의 입장 차이 때문에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별하고 있다. 비아스는 화리트에게 오누이의 정을 품고 있지 않지만, 동시에 남매간에 가져야 할 터부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카린돌과 화리트는 죽음 이후 하나가 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완전한 합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갈로텍은 세페린에 대한 편집증적인 소유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그녀를 죽음에서 돌아온 복수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결국 그 자신 역시 광적으로 복수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모와 륜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엇갈리는 방향을 향해 걷는 듯싶다. 가장 서로를 위하지만, 그래서 서로가 가장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하는 그러한 관계이다. 천 년이 지나서도, 죽여서도, 죽어서도, 죽음에서 되살아나서도, 남은 생애를 함께 하면서도 작품 속에서 남매들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고착화되어 있다. 打者는 이러한 고착을 용어사전에서 ‘평행선’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작품을 끝까지 읽은 독자들은 잘 알고 있듯이, ‘눈물을 마시는 새’는 세계 자체도 고착되어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과거가 현재와 중첩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물론 춤추는 자가 자신의 춤을 멈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수많은 정체(停滯)들이 발생한다. 어느 시점에서건, 시간을 한 단면으로 자른다면 그 시간은 순간적이며, 경계적이다. 현재의 사건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결과이며, 동시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원인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다. 그러나 ‘눈물을 마시는 새’의 시간은 멈춰있기 때문에, 또는 멈춘 상태로 흐르기 때문에, 시간의 잘린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재’는 마치 한계선마냥 두텁다. 그 두터운 현재의 지층 사이로 과거가 침투한다. 현재가 미래의 원인이 되지 못해 미래는 없어지며, 과거의 결과가 되지 못해 과거의 결과들이 현재에 망령처럼 살아 있다. 결국 시간이 역류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설정을 이미 ‘퓨처 워커’에서도 보았고, ‘폴라리스 랩소디’의 바라미 역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존재로서 이런 설정을 도입하고 있다.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과거가 현재를 적극적으로 옮아 매고 있다. ‘퓨처 워커’에선 ‘hjan’에 의해 과거가 현재로 역류하고, ‘폴라리스 랩소디’의 바라미에게 전달된 과거 인물의 유지는 현재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모든 이들 중에서도 이러한 정체가 가장 잘 나타나는 이는 춤추길 그만둔 장본인, 케이건 드라카이다.
케이건 드라카의 정신 상태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가 스스로 자주 ‘분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분리되는 이유는 그가 두 가지 시간대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유의미한 것은 모두 과거의 유산들뿐이며, 그것과 관계없는 모든 것들은 그저 스쳐지나가고 있다. 그는 과거에 천착시킨 나가의 배신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희미한 기억만 가지고 있으며, 명확한 시간관념조차 가지지 못한다. 과거 아라짓 왕족이었던 자의 의무이기에 헤인샤 사원의 부탁을 들어주긴 했지만, 구출대와 이별하자마자 그는 그들과의 구출행을 기억에서 흘려보낸다. 그에게 있어 이제 막 끝난 구출행과 20년 전의 판막음은 같은 시간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둘 다 기억할 필요도 없고 기억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시간의 사건들이 된다. 그가 현재를 살지 않고 과거를 살기 때문이다. 현재 시간에서 그가 자의든 타의든 무엇인가를 행하는 이유는, 그가 과거에 아라짓 전사였고, 키탈저 사냥꾼이었고, 여름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오직 과거에만 존재와 행동의 이유를 두고 있고, 그래서 과거에 고착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고착이 앞서 말한 세계의 정체를 낳게 된다.
3. 키탈저 사냥꾼, 모순, 용의 특별한 힘
작품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일종의 메아리처럼 실체 없이 되풀이되기만 하는 재미있는 소재가 있다. 현재가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되던 많은 것들이 현재로 소환된다. 흑사자, 용, 왕, 아라짓 전사, 대확장 전쟁, 용인 등등. 그런데 키탈저 사냥꾼은? 과거의 다른 것들이 현재를 무대로 활동하는 가운데 키탈저 사냥꾼만은 이전처럼 케이건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사실 키탈저 사냥꾼은 작품의 경계선상에서 더 많이 부각되는 소재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 챕터 0을 포함하여 18개의 챕터 중 3개의 챕터 머리말이 키탈저 사냥꾼 관련 글이고, 4권 말미의 용어 사전에도 그들이 등장하며, 무엇보다도 제목이 키탈저 사냥꾼의 전승이다. 작품의 제목과 챕터 머리말이 작품의 해석에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키탈저 사냥꾼은 독자 입장에선 한 번 쯤 생각해봐야 할 소재이다. 그러나 그 중요도에 비해 작품 자체에선 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몇 가지 전승들이 전해지고, 케이건 드라카의 수많은 정체 중 하나가 키탈저 사냥꾼이라는 것이 드러나며, 그들이 스스로를 용의 자손으로 여기고, 모순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이 적은 정보에서 우리는 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모순’이다. 서로 다른 두 명제가 논리적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면서도, 동일한 정도의 진리값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모순적’이라고 부른다. 어느 쪽도 긍정할 수 없기 때문에 두 명제는 정지 상태에서 고착된다. 그러니 모순이 고착 상태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는 서로 맹렬히 대립하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모순은 가장 격렬하면서도 가장 고요하다.
키탈저 사냥꾼과 모순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것은 역시 용이다.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식물로 태어나지만 식물의 가장 큰 적이 되는’ 용은 모순의 물화나 다름없다. 그런데 키탈저 사냥꾼은 모순에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모순의 존재인 용을 숭배하며, 용의 자손을 자처한다. 용의 특별한 힘은 무엇인가? 용이 가지는 특별한 힘은 두 가지이다. ‘불을 쓴다’는 점, 그리고‘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불을 쓰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점이 왜 특별한가? 그 두 가지 능력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4.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하나는 셋을 부른다, 입장들, 모순의 특별한 힘
작품의 중심적인 주제는 역시 작품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법이다. 작품 제목인 ‘눈물을 마시는 새’와 그것이 암시하는 ‘왕’만큼이나 자주 반복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는 말이다. 오죽이면 작품의 첫 번째 챕터 머릿말을 담당하겠는가? 그리고 그 금언과 한 쌍이 되는 ‘하나는 셋을 부른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 ‘셋’은 길잡이, 대적자, 요술쟁이이고, ‘하나’는 그들이 상대하는 대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에선 ‘상대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언뜻 내비쳐주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두억시니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륜과 함께 기뻐하던 대선사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대선사는 침통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다는 듯 티나한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기랄, 내가 대적자야! 그까짓 놈들, 내가 다 물리치지.”
비형과 륜은 만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선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당신이 대적자였소. 그럼 길잡이에게 물어봅시다. 케이건? 티나한이 그 두억시니들을 저지할 수 있겠나?”
“만용입니다.”
딱 잘라 말하는 케이건의 말투에 비형은 그만 미소짓고 말았다. 티나한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비형을 쏘아봐준 다음 케이건을 쳐다보았다.케이건이 먼저 말했다.
“수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소. 티나한. 당신 길잡이의 판단을 믿으시오.”
티나한은 길잡이 케이건을 존중했다. 하지만 자신의 호승심 또한 존중했다.
“너는 상대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소. 모두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
“그게 그거잖아.”
“전혀 다른 말이오. 투정이 심한 어린애에게 투정이 왜 나쁜 건지 자상하고 끈기있게 설명해준다면 그것은 어린애를 ‘상대하는’ 거요. 하지만 어린애의 머리를 돌로 내려찍으면 그건 그냥 어린애를 ‘죽이는’ 거요. 내 방법은 그런 식이오. 잔인하고 추하고 악의에 찬 것이지.”
티나한은 부리를 닫고는 놀란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대적자’는 물론 ‘간단히 말해서 방해되는 것 다 때려 부수는 파괴자’이다. 그러나 대적자의 ‘때려 부숨’은 자신의 ‘죽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케이건은 말하고 있다. 이 대화 도중에 쥬타기 대선이 대적자의 행동에 대해 길잡이의 조언을 구하는 것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즉 대적자의 ‘때려 부숨’은 ‘셋이 하나를 상대하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지, 무작정 ‘죽이고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피를 마시는 새’에서 ‘상대함’의 의미에 대해 다루는 또 다른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옛날이야기?”
론솔피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노쇠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지만 사모 역시 옛날이야기만 중얼거리는 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그의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났다. 사모는 그것을 반박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멘이 길잡이일 것이다. 그을린발은 대적자일 테고. 하지만 나는 세 번째 레콘을 찾지 못했다. 세 번째는 요술쟁이다. 그 여자, 아니, 남자일지도 모르지.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만 내겐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론솔피는 멍한 얼굴로 사모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왜 그 셋을 찾아야 하는데?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고 했지. 뭘 상대하려고?”
“치천제.”
론솔피는 갑작스럽게 관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엘시가 황제가 되려면 치천제는 사라져야 한다.
“계속 말해봐.”
사모는 론솔피가 상대한다는 말을 제거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 해석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
“나는 상대한다고 했지 상대하는 방식은 말하지 않았다. 레콘들은 신을 경배할 수도 있다. 혹은 무시할 수도 있다. 물론 투쟁할 수도 있다.만약 레콘 길잡이와 대적자, 요술쟁이가 사람의 신과 싸우기로 한다면 레콘은 마족이 되겠지.”
론솔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 너는 우리가 마귀 종족이 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그래.”
그 단호한 태도는 론솔피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했다. 론솔피는 사모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했다.
“혹은 신의 금군 종족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사모는 팔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나 인간, 나가도 그렇다.”
부정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긍정하는 것도 ‘상대함’의 방법이다. 만약 부정한다면, 죽이는 것, 일부를 부수는 것, 설득하는 것이 각각‘상대함’의 방법이 된다.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대상과 마주하는 것은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한다’는 말은 ‘상대하는 방법들을 갖추고 자신과는 다른 대상과 마주서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내 앞에 있는 내가 아닌 자는 동등한 높이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 ‘하나’는 ‘상대하는 대상’이고, ‘상대함’은 ‘하나와 마주섬’이라면, ‘셋’은 무엇인가? 왜 하필 상대하려면 셋이 갖춰져야 하며, 그 셋이 길잡이, 대적자, 요술쟁이로 이루어지는가? 여기에서 내 능력만으로 이것을 답하는 것이 조금 힘겨움을 느낀다. 그러니 이 방면에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의 말을 빌려와야겠다. 내가 인용하려는 인물은 헤겔이다. 헤겔은 모더니즘의 완성자이자, 수많은 안티 철학자들(즉 실존주의자,생철학자, 포스트모더니스트 등)을 거느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사람의 사상을 모두 이해한 후 작품에 완벽히 적용시키는 것은 나에겐 무리이다. 나는 그에게서 ‘변증법’만 살짝 빌려오도록 하겠다.
철학 자체든 그것에 사용된 용어든 간에 헤겔의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칸트의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변증법’도 사실은 칸트의 용어이니,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오성(悟性)의 기능과 한계를 그은 후, 이 한계를 넘어서는 사변적 이념을 시도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몇 가지 지적한다. 이성은 ‘완전한 통일에의 욕구’ 때문에, 순수오성의 종합을 통한 이성추리를 시도한다. 이 이성추리는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 번째인 심리학적 이념은 다시 네 가지 이율배반(二律背反)을 낳는다. 그것은 각각 다음과 같다.
㉠ 정립 – 시공간은 한계를 가진다
반정립 – 시공간은 한계를 가지지 않고 무한하다.
㉡ 정립 – 세계의 모든 복합적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성립된다.
반정립 – 세계의 어떤 복합적 실체도 단순한 부분들로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 정립 - 세계에는 자유에 의한 원인이 있다.
반정립 – 자유는 없고, 일체가 자연(결정적)이다.
㉣ 정립 - 세계원인들의 계열에 있어서 어떤 필연존재가 있다.
반정립 – 이 계열에서 필연적인 것은 없고 일체가 우연적이다.
각각 모순적인 두 명제가 동시에 참으로 증명되는 이러한 이율배반이 성립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가상의 논리학(Logik der Scheins)’이기 때문이다. 이 가상의 논리학을 칸트는 ‘선험적 변증론’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헤겔의 철학은 칸트가 형이상학의 한계라고 못 박아 놓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정립(Thesis)과 반정립(Antithesis)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종합(Synthesis)을 기획한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서의 변증법이 나타난다. 나는 변증법을 헤겔 철학 전체와 연계하여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변증법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항을 특별히 알아놓아야 한다. 첫째, 변증법은 모순적인 두 대상을 공존시킨다. 둘째, 정립과 반정립이 일단 변증법을 통해 종합되면, 그것은 지양(止揚, aufheben)된다. 지양이란, 정립과 반정립이 각각 자신이 가진 의미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상호작용 속에서 각 의미를 보존함을 뜻한다. 좀 어렵게 설명되었는데, 예를 간단히 들어보자. ‘낮’과 ‘밤’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 둘의 종합인 ‘하루’라는 말 속에서 낮과 밤은 공존할 수 있으며, 심지어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의 의미를 긍정한다. ‘삶’과 ‘죽음’도 모순적이지만, ‘일생’이라는 더 높은 차원에서 동시에 긍정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지양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어떠한 존재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이미 서로 모순적이다.
변증법을 개념의 시초에서부터 추적했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지도 모르지만, 사실 변증법은 거칠게 사용한다면 굉장히 넓은 범위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우리의 대화, 그중에서도 특히 토의나 논의는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지는가? 서로 대립되는 두 입장이 말을 매개로 하여 상대의 입장을 변화시키려 한다. 만약 합치된 결론이 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린다면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종합되지 않은 것이다. 한 입장만 변화하여 다른 입장에 동화되어버린다면, 그것도 변증법적으로 종합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두 입장과 다른 제3의 입장에서 통일된 결론이 도출된다면, 그것은 ‘종합된’ 것이다. 정말 거칠게 말하자면, 변증법은 서로 다른 입장들이 발생할 때마다 시도된다. 우리가 한 입장에 서서 다른 입장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가 ‘상대할’ 때마다 변증법은 시도된다.
이제 작품에 대입만 하면 된다. 셋은 왜 길잡이, 대적자, 요술쟁이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우선 상대하려면 대상을 찾고, 판단해야 한다.(길잡이) 그리고 대상과 맞서야 한다.(대적자) 마지막으로 그 대상과 내가 지양(止揚)되어야 한다.(요술쟁이) 요술쟁이의 역할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설명은 사모 페이의 말에서 나타난다.
“정의와 요술은 반대되거든.”
“응?”
느리게 움직이는 햇빛을 따라 사모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우아한 발놀림으로 허리와 다리를 차례로 데웠다.
“정의(正義)를 가장 간단히 정의(定義)하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거지. 내 목숨과 네 목숨은 같다. 따라서 내 목숨과 네 목숨은 똑같이 대해야 한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요술은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것이지. 주테카가 세 번째 레콘이라면 그는 요술쟁이여야 하는데 정의를 사랑한다면 그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지양의 과정이다. 결국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와 ‘하나는 셋을 부른다’라는 두 금언은 변증법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셋’은 ‘하나’를 ‘부숴버림’으로써 상대할 수도 있다. 변증법적 지양은 상대함의 한 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셋이 하나를 ‘변증법적으로 상대할 때’ 기묘한 현상, 즉 ‘더 높은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경우에 모순이 특별한 힘을 가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모순인 것은 지양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용은 모순의 알레고리이다. 용은 불을 사용한다. 헤겔이 인용하는 철학 중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것도 있는데,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세계의 근원이자 근본원리라고 말한다. 불은 ‘만물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원리를 보여주며, 변화와 생성은 언제나 모순되는 것의 교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유(有)와 무(無)라는 두 모순적 개념의 지양, 유가 무가 되고, 또 무가 유가 됨은 ‘생성, 변화’에서 가능하다.(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794 를 읽으면 된다. 네이버캐스트 철학의 숲 – 헤라클레이토스 편. 아니면 거스리의 ‘희랍 철학 입문’도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또한 용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모순을 계속해서 변증법을 통해 지양하면 결국 어떤 완전한 일자(一者)로 귀결된다. ‘너와 나’가 지양되면 ‘우리’가 되고, ‘우리와 저희’가 지양되면 ‘사회/국가’가 된다. 모든 사람이 하나로 지양되면?
“증오와 반목이 영원할 거라는 저주처럼 들리는군. 어떤 한 종족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단 하나의 종족만이 승리자가 되어 세계를 지배하게 될 때까지?”
“그럴 리는 없습니다. 빛이 탄로났으니까요.”
“그렇군.”
사모 페이는 알고 있었다. 라수는 언젠가 환상벽에서 읽은 그 충격적인 내용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도깨비와 레콘, 나가, 인간은 두억시니를 남겨놓고 빛이 되어버렸던 첫 번째 종족처럼 완전해질 수 없다. 네 신 중 한 명이라도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없게 되면 더 이상 윷가락은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다른 세 종족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족도 완전성을 획득할 수 없다. 만약 네 종족 중 한 종족이 완전성을 획득하면 다른 종족은 변화 없는 정체에 빠져버리게 되므로.
“우리 네 종족은 모두 동시에 완전성을 얻어야 합니다. 한 종족이라도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종족이 준비가 될 때까지 끝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그 기다림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저는 되도록 그것이 즐거움이길 바랍니다.”
“언제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수천 년? 수백만 년? 수십억 년?”
(…)
“……30만 년이라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사모는 비늘을 부딪쳤다. 그 갑작스럽고도 격렬한 동작에 엘시는 충격을 느꼈다. 사모는 고통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그거?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고상해질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지. 엘시. 그대에게 미래를 알려주지. 나 자신의 이해가 얕기 때문에 약간 조악한 표현을 쓰게 될 거라는 것을 미리 사과하마. 사람들은 앞으로 30만 년 동안 서로를 가장 가치 있는 사냥감으로 대하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을 얻게 되지. 그런 자각을 느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30만 년이다.”
5. 방법론 – 용인, 군령자, 왕, 일기와 수수께끼와 세상을 구원하는 아름다움, 하늘치
모순은 완전성을 담보한다. 신이 실재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관에서 완전성은 아마도 가능한 개념일 것이다. 이미 ‘빛의 종족’의 전례가 있으니 당연히 가능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눈물을 마시는 새’의 사람들은 어쨌든 삶에 충실하다보면 30만 년 후에 완전성을 획득할지도. 그러나 기다림은 길고, 세계엔 그 기간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몇 가지 모티브들이 발견된다. 몇 가지 살펴보자.
우선 우리가 글의 첫 부분에 언급했던 용인이 있을 수 있다. 용인은 특유의 예리함을 통해 완벽히 타인의 입장에 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용인은 한계를 지닌다. ‘드래곤 라자’에서 엘프가 왜 세계로부터 도태되는가? 일반인 사이의 용인은 륜의 비극을 반복할 것이다.용인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하늘치와 퀴도부리타라는 한 쌍을 감당하기도 버거워했다.
군령자는 서로 다른 영(靈)들이 하나의 육(肉) 속에 공존하는 자이다. 군령자가 모순의 결합을 체현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은가? 확실히 군령자는 하나의 육체 속에서 다수의 영혼들을 공존시키며, 이를 통해 영혼을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작중 갈로텍과 탄실 구마리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군령자의 영혼은 ‘영적 잡종’이다. 그러나 군령자에게서 일어나는 영혼의 결합은 확장적이지 않고 수렴적이다.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잠시 말을 잠시 빌자면 ‘개념의 확장 대신 개념의 소거가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군령자들의 영혼은 ‘현재 군령자의 육체’가 살아가는 방식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변증법의 종합(Synthesis)에서와는 달리 자신의 영혼이 가진 종족적 특성을 ‘버리는’ 방식으로 결합한다. 어쨌거나 육은 영에 의지하고, 영은 육을 통해서만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령자 역시 완전성을 위한 충분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용인도 군령자도 안 된다면, 왕은 어떤가? 왕은 라수 규리하가 보장하는 좋은 답이기도 하다. 천지척사에서 라수는 사모에게 “하지만 우리에겐 왕이 있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왕은 무엇인가? 왕은 대리자이다. 공동체를 이루고 유지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동체의 욕망을 해소해주는 자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왕은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폭력성을 희생을 통해 해소해주는 자로 설명되며, 이것은打者가 말하는 대로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의 직접적인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은 기실 공동체의 폭력성 말고도 다른 수많은 것들을 대신한다. 대호왕이 된 사모 페이가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점이 이것을 명확히 해준다. 왕의 얼굴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아라짓 전사들은 왕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상상해낸다. 도저히 위조해낼 수 없고, 그래서 헷갈릴 수도 없는 나가 특유의 목소리조차 병사들은 마음대로 창조해낸다. 왕으로서 살아가는 한 사모는 자신에게 투사되는 공동체의 욕망을 회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왕이 입장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모아 놓은 집단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을 ‘희생’을 통해 해소시키고, 이것이 완벽하진 않아도 ‘서로가 하나됨’의 감각을 그 구성원들이 익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은 완전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은 사실상 외부적이고, 그래서 일시적인 해결책이다. 구성원들‘끼리’ 해소된 모순이 아니니 입장의 차이는 여전하다. 언젠가 벌어질 때까지 봉합해 놓은 상처나 다름없다. 집단을 유지하려면, 그 존속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공격하거나, 아니면 모순을 일으키는 입장들을 계속해서 ‘죽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전자를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후자를 ‘피를 마시는 새’에서 보게 된다.
다른 방법은 없는가? 아직 있는 것 같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네 선민종족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며, 그에 따라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른 방법으로 살아간다. 이 네 종족의 서로 다른 개성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피를 마시는 새’의 단행본엔 통신연재본에는 없었던 글, 즉 작품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하이스 대학의 무명 학자의 일기’가 있다. 그 일기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나가는 ‘세상을 가깝다고 말하는 자’이다. 나가는 표면, 경계에 위치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에 걸쳐 있고, 외부와 가장 직접적이다. 나가는 ‘가깝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죽음과 떨어져 있지만 외부의 영향에 예민하고(외부의 불꽃을 볼 수 있을 정도로),정신적으로 타인과 ‘말’이라는 매개 없이 직접 연결되지만 냉철한 이성을 공유할 뿐 영혼 깊숙한 감정을 공유하진 않는다. ‘눈물을 마시는 새’ 단행본 4권의 용어사전에 나오는 ‘심장탑이 하늘과 땅을 잇고 있다’는 표현은 나가의 경계적인 위치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신과 사람 사이에 위치하는데, 그들이 받은 선물인 ‘신명’이 그것을 상징한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가지기 때문에 신에 가까울 권리를 가지며, 그래서 신의 권리인 불사(不死)를 조금이나마 따라할 수 있게 된다.
도깨비는 ‘세상을 느리다고 말하는 자’이다. 도깨비는 빠르기 때문에 쉽게 질리지만, 더욱 빠르게 새로운 대상을 찾아낸다. 그들이 선물 받은 ‘불’은 이러한 그들의 ‘빠름’을 잘 보여준다. 불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것들도 빠르게 변화시킨다. 순간을 즐기며 끊임없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창조해내는 도깨비는, 그래서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없는 피와 폭력을 싫어한다. 그것을 만나면 그들은 ‘죽음도 쫓아오지 못하는 속도’로 도망가거나(어쨌든 이미 도깨비불이 된 어르신은 죽음조차 따라잡기 힘겨워한다), 아니면 상황 자체를 종결시켜 그것을 끊어버린다. (페시론 섬과 아킨스로우 협곡에서처럼)
레콘은 ‘세상을 엉성하다고 말하는 자’이다. 그들은 비길 수 없는 단단한 육체로 무장하고, 어떤 사람도 설득할 수 없는 완고한 정신을 갖추고 있다. 그들에겐 자신의 육체만큼이나 단단한 자신만의 무기와, 자신의 정신만큼이나 굳은 사명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의 무기는 신만이 줄 수 있는 단단함을 갖추고 있다. 무기를 든 레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상들은 엉성하고 무른 것들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선민종족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엄청난 일도 그들의 시각에선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하늘의 왕독수리를 맞추기 위해 깊게 뿌리내린 나무를 뽑아 던질 수 있고, 물을 길어 쓰기 위해 운하를 팔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무명 학자의 일기’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말하는 자’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 대답은 무명학자의 몫이지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작품에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무명 학자의 일기보다 더 모호하지만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만한 소품이 하나 더 있다.
문 : 나가와 도깨비, 인간, 레콘이 살고 있는 집에서 누군가가 바닥에 바늘을 떨어뜨렸다. 잘 보이지 않는 바늘을 찾아내는 방법은?
답 : 도깨비가 바늘이 뜨거워질 정도의 도깨비불을 퍼뜨리고 나가가 뜨겁게 달아오른 바늘을 눈으로 확인하여 집어올린다. 그리고 인간은 온힘을 다해 레콘을 말려야 한다. 설득력이 충분하다면 레콘이 집을 들어올려 흔드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칼리도 지방에 전해지는 수수께끼.
기발하지만 큰 의미는 없어 보이는 이 소품이 네 선민종족의, 특히 여간해선 작품에 잘 나타나지 않는 인간의 특성을 언뜻 보여준다. 이 소품에서 도깨비는 불로 ‘바늘을 재빨리 변화’시키고, 나가는 ‘표면에서’ 바늘(외부)의 불꽃을 본다. 레콘은 아무렇지도 않게 ‘엉성하게 결합된 집과 바늘을 해체’시킨다. 그리고 인간은 ‘설득’을 통해 레콘을 말린다. 인간은 ‘설득하는’ 존재이다. 세계에서 나가는 ‘거리’를, 도깨비는 ‘속도’를, 레콘은 ‘강약’을 보고, 인간은 ‘관계’를 본다. 아마 무명 학자는 군령자에게 ‘세상은 뒤죽박죽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그들은 바로 인간이라고 한다’라고 말해줬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명확해 보이지 않는 대상에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하여 ‘연결되어 존재’한다. 규리하 공작으로서 정우 규리하의 지위가 적법한지 적법하지 않은지는 도깨비에겐 ‘시시한 일’이다. ‘레콘 조사가 되고 싶은 것’과 ‘하늘낚시터를 만드는 것’ 사이에 등호기호를 붙이는 것은 레콘에게 ‘수단과 목적을 헷갈린’ 판단이다. 그러나 인간은 대상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그것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보고, 그 관계 사이에서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한다. 그래서 도깨비에겐 시시할 따름인 적법성을 따져보고, 레콘에겐 헷갈릴 따름인 수단과 방법의 동일시를 합리화한다. 대상이 정의되어야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 어떤 관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지 알 수 있으니까.간략히 말해, 인간에게 있어 관계는 현상학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단지 움직임, 운동, 연결, 한 곳과 다른 곳의 사이에만 존재한다, 마치 바람처럼, 혹은 ‘어디에도 없는 신’처럼.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은 나늬이다. 나늬는 작품에서 ‘네 종족이 모두 아름답다고 느끼는 전설적인 미인’으로 표현된다. 또 작품 후반부의 그리미 마케로우의 말에 따르면 미모든 달리기든 나늬는 ‘모든 종족을 따라오게 만드는’ 인간이다. 나늬에게는 또 다른 개성이 있는데, 나늬에겐 그녀와 닮은 자매인 ‘보늬’가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보늬가 나늬보다 떨어지는 미모를 가진다고 판단되며, 그래서 나늬와 비교될 때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는 점이다. ‘보늬인지 나늬인지 알려면 두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보늬가 부정이라면 나늬는 긍정이다. 나늬는 모든 종족이, 모든 사람이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가치를 상징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작품에서 데오늬 달비가 ‘달리기로 사람들을 따라오게 만드는’ 나늬이기 때문에, 나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마치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기 쉽다. 사실, 사람들의 나늬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능동적이고 참여적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다시 한 번 다른 이의 말을 빌리겠다. 조카딸에게 쓴 편지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작품 ‘백치’를 쓴 주요의도가‘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밝히며,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말한다. 도대체 아름다움이 무엇이기에 세상을 구원하는가? 아름다움은 가치평가이며, 개인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인식의 장벽을 낮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에서 내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긍정할 수 있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발견하는 것. 그래서 아름다움은 능동적이고, 지향적이며, 참여적이다. 모든 사람이 한 명의 인간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모두가 나늬를 통해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늬는 ‘모든 사람이 하나로 지양될 수 있다’는, 완전성의 신화(神話)이다.
이제 나늬를 통해 ‘눈물을 마시는 새’의 완전성을 확실히 담보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살펴보아야 할 모티브가 있다. 사실 작품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완전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늘치. 첫 번째 종족이 남겨준 완전성의 상징이자 완전성에의 약속. ‘피를 마시는 새’에서 사라말 아이솔을 통해 힌트를 얻은 제이어 솔한은 하늘치가 ‘영에 작용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에 어떻게 작용하길래 그것이 완전성으로의 약속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올바른 하늘치 사용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쨌든 하늘치가 영에 작용하는 하나의 예시를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아실 제이어의 하늘치 사용법이 명확히 묘사되지 않은 것에 비해, 이이타는 하늘치와의 신비한 정신적 합일-분화의 과정을 거쳐 하늘치를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이이타는 이이타-하늘치였으며, 하늘치-이이타였으며, 하늘치-하늘치였으며, 이이타-이이타였다. 이이타는 하늘치와의 동화를 거치고, 하늘치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것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재미있는 가정이 떠오르지 않는가? 두 명이 동시에 한 하늘치와 동화하면 그 두 명은 하늘치 속에서 동화될 수 있는가? 동화를 거친 다음엔 하늘치와 그 두 명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또 한 가지, 정우가 하늘치 곁에서 엿새 동안 ‘용이었던’ 이후, 정우 역시 하늘치를 움직일 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정우는 이이타와 마찬가지로 하늘치와의 ‘영의 지양’을 겪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하늘치는 작품 속에서 완벽한 신용을 가지는 완전성에의 방법일 수도 있다.
6.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매우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역시 ‘완전성의 추구’이지 않나 싶다. 우리는 바로 5번 장에서 완전성을 추구하려는 현란한 시도들을 살펴보았다. 우리의 불완전성은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모순적이고, 그래서 가장 가까운 타자와도,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서로를 끔찍이 위하는 남매라 하더라도, 결국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평행선을 그리진 않는다. 변증법에 대해 짚어둘 점을 세 가지 꼽았을 때, 나는 세 번째 사항으로 ‘어떠한 존재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이미 서로 모순적’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적어도 완전성이 실재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에선 ‘서로 모순적인 것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순은 그 자체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
나는 이 글을 시작할 때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해 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나는 이 글을 카시다 암각문의 빈 칸을 내 나름대로 채우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by | 2012/04/05 00:39 | books | 트랙백 | 덧글(0)
필자가 ‘폴라리스 랩소디를 분석해보자’를 쓴 후 1년이 지났고, 이제 슬슬 다시 한 번 타자의 글을 돌아봐도 좋겠다 싶어, 이번엔 타자의 장편 글 중 가장 인기도 지지도도 없어뵈는 ‘퓨처 워커’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이전에 필자가 썼던 분석글은 스스로 예상했듯이 커다란 호응을 받지 못했고, 이번 글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은 한다. 그래도 이런 분석글을 써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 도움이 되고, 또한 몇몇 분들이 필자의 분석글에 반응을 보여주기는 했으므로, (리플과 쪽지를 보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비록 네 분에 불과했지만) 약간의 자신을 가지고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1. ‘퓨처 워커’는 시간을 주제로 한 소설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묻냐?’고 반응할 지도 모르겠다. 뭐, 사실 시간의 문제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는 ‘퓨처 워커’가 ‘시간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퓨처 워커’는 ‘현존재의 실존방식을 그려낸’ 소설이라고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싶다.
‘퓨처 워커’에서 나타난 타자의 시간관은 (타자가 실제로 참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시간이 미래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간다는 생각은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의 현존재의 실존 분석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런 짧은 글 안에서 정확히 드러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 글을 진행하기 위해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하므로,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에 대해 잠시 짚어보도록 하자. 물론 필자는 하이데거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거니와, ‘퓨처 워커’를 이해하기 위해 하이데거 철학의 전체가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언급은 매우 조악하고 간략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존 철학이 간과하고 있던 문제, 즉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으며 존재하는 존재자’인 현존재를 분석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들과는 달리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재를 제외한 다른 존재자들에게 있어 존재와 그 존재자 자신 사이에 어떤 간극도 없다. 그러나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을 수 있을 만큼’ 존재 그 자체와 거리를 가진다. 그래서 현존재는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내던져진 존재자’임을 의식하며, 따라서 자신의 삶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의무가 없음을 인식한다. 즉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ecede l'essence’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현존재는 ‘실존’하며 존재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실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실존’하기 위해선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현존재Dasein’라는 단어가 충분히 알려주듯, 현존재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거기에 있는’ 존재이다. 즉, 현존재는 어쨌거나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자신이 있는 시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현존재는 자신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자신의 ‘실존’과 연관시켜 이해한다. 이 글에선 현존재가 공간적인 의미에서는 ‘세계-내-존재’으로서 존재한다고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다. 물론 이 ‘세계-내-존재’의 개념은 하이데거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지만, ‘퓨처 워커’를 이해하기 위해 이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기엔 효율성과 능력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즉 이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퓨처 워커’의 이해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을 뿐더러, 이것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도 없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존재론적 순환’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서로의 개념에 의지하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므로, ‘세계-내-존재’을 제외하고 하이데거의 나머지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능력이 안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여기에선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는 하이데거의 시간개념에 대해 ‘퓨처 워커’와 연관될 수 있는 부분을 발췌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현존재의 매우 특징적인 시간관은 그가 ‘존재하도록 내던져진 존재자’라는 점과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현존재는 그 스스로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존재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가진 시간에 한계가 있음을 안다. 그래서 현존재는 시간을 그냥 다가오는대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에로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스스로를 형성해 나간다. 현존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통해, 가능태로서의 시간인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고 이러한 내던짐이 있은 다음에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상황들과 ‘마주하게’ 된다. 지나간 시간들의 퇴적물인 과거는 이러한 미래와 현재에 비추어 해석될 때에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존재가 미래-현재-과거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 인식은 문학 분야에서도 매우 직관적으로 포착된 바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러시아 시인 뿌쉬낀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시의 2연은 ‘마음은 미래에 살고/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인데, 여기에선 미래에 자신을 기투하고 현재와 마주한 후, 과거를 유의미하게 받아들이는 현존재의 시간관을 본질적으로 통찰해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상의 시간에 대한 논의에서 또 하나의 시간이 가지는 특징을 알아낼 수 있다. 바로 시간은 현존재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실존하기 때문에’ 각 현존재들로부터 각각의 시간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을 다르게 바라보면 ‘현존재 이외의 존재자들에게는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사실 역시 이끌어낼 수 있다. 시간은 ‘실존함’을 통해서만 형성되며, 실존은 미래-현재-과거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인식함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따라서 실존하지 않는 존재자들, 즉 식물이나 동물, 실존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인간(즉 유아나 죽음을 전제로 한 시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성적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 자체를 지니지 못한다. 시간은 현존재만 만들어낼 수 있고 현존재만이 그 속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각 현존재들은 그들의 고유한 각자의 시간을 지닌다.
2. ‘퓨처 워커’에서의 시간
이상의 하이데거 철학에 있어서의 시간 개념을 살펴본 결과, 이것이 ‘퓨처 워커’에 있어서의 시간과 거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시간은 미래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흐른다. 그리고 인간은 그 반대로 과거에서부터 있어왔으며, 현재를 마주하면서 미래로 자신을 내던진다. ‘시간의 장인’은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즉 실존하는) 인간이다. 드워프나 오크는 몰라도,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드래곤이나 엘프는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간은 어떤 객관적인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개인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미가 할슈타일 후작에게 말하듯이) 각 개인은 각자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시간이 곧 사건’이라는 것은, 현존재가 실존하기 위해 자신을 미래에 기투하는 그 행위 자체에서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의 후반부에 발레리 신스라이프가 아일페사스에게 해 주는 설명은 사건(즉 실존하려는 행위)과 시간의 상호의존관계를 알려준다. ‘결과에만 관심이 있고, 결과를 앞당겨 즐긴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미래에 내던짐’,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삶’을 지시한다. ‘퓨처 워커’에서 시간이 물화(物化)되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이 제공되긴 하지만, 결국 골자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퓨처 워커’는 판타지 소설이므로, 시간에 비현실적․환상적 변수를 집어넣는다. 바로 미, 신스라이프, 파가 그것이다. 제레인트에 의해 ‘과거, 미래, 교차점’이라고 명명된 이들은 작품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그러므로 이들을 분석하는 것은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일 것이다.
2.1.1. 미: 과거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
작품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말 중 하나인 이 말은 이제까지 SF나 판타지 소설에서 쓰였던 각종 시간이동을 이용한 내용전개를 송두리째 부정해버린다. 미의 저 말은 과연 운명결정론을 의미하는가? 필자의 의견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과거가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미래가 고정되어있다’는 저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선 미라는 인물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미의 저 발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미는 작품 내에서 잘 알려진 대로 퓨처 워커이다. 퓨처 워커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자라고, 마치 어떤 점쟁이나 예언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작품 내에선 퓨처 워커가 그러한 상식적인(?) 인물은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우선 미 스스로가 말한 저 이상한 말, 즉 ‘과거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는 말 외에, 미 스스로가 자신의 퓨처 워킹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운차이가 미에게 할슈타일 후작의 행방을 물었을 때, 미는 운차이에게 위의 말과 똑같은 설명을 한다. 그리고 운차이는 거기에 덧붙여 그란과의 대화에서 ‘조금 전 미는 과거가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말했지. 그녀는 사실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볼 줄 아는 거라고 했지. 그랬기에 미래도 안다고.’ 라고 미의 차후의 설명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이 부분 외에도 퓨처 워커가 도대체 뭔지 짐작케 하는 작은 단서를 주는 곳이 또 있다. 턴빌에서 할슈타일 후작이 신스라이프의 문제를 풀기 직전, 네리아와 파하스는 퓨처 워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파하스는 퓨처 워커가 ‘미래를 보는 사람도 미래를 아는 사람도 아닌, 미래를 걷는 자’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미묘한 시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봄․앎은 주체와 객체 간의 거리를 전제한다. 어쨌든 ‘보려면’ 대상이 나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아는’ 것도 마찬가지로 앎의 대상이 앎의 주체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철학적으로는 ‘대자적für sich’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래를 ‘걷는’ 것은 그 행동주체가 미래와 ‘더불어 있음’을 내포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가 다른 사람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를 마시는 새’의 그리미 마케로우는 환상벽을 통해 미래를 ‘본다’, 그러므로 그리미 마케로우가 ‘본’ 미래는 가변적이다. 그러나 미는 미래를 ‘걷는다’, 그래서 미가 본 미래는 반드시 고정적이다. 운차이나 할슈타일 후작에게는 ‘미래’인 시간이, 미에게는 이미 ‘과거’의 시간이다. 미는 이미 그 시간을 ‘걸어갔고’, 따라서 미에 의해 밟힌 그 시간은 이미 전인미답지가 아니다. 그것은 미의 퓨처 워킹에 의해 이미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퓨처 워킹이란 ‘(파하스의 말대로) 미래를 걸어간 후, (운차이가 말한대로) 과거를 보는’ 행위를 가리키게 된다. 작품 말미에 미가 할슈타일 후작에게 ‘내가 미래를 만드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미래를 미리 걸어본 미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미래까지 고정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가 ‘과거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 ‘과거’는 ‘미의 시점에서의 과거’이고, ‘미래’는 ‘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시점(미-육체를 포함한다. 미-육체는 다음 장에서 설명)’에서 미래이다. 제레인트가 미를 ‘과거’라고 칭했을 때, 그는 미가 점유하고 있는 독특한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2.1.2. 미: 두 개의 위상, 3인칭화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미가 이미 퓨처 워킹을 통해 미래를 걸어간 상태라고 하더라도, 미가 실제로 살고 있는 시공간은 다른 사람의 시공간과 다를 바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의 정신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앞선 시간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의 육체는 다른 사람과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라는 인간 속에서 두 개의 위상이 분리된다, 즉 미는 미-정신과 미-육체라는 두 위상을 지니는 것이다.
미가 스스로를 ‘나’라는 1인칭 대명사로 칭하지 않고 ‘미’라고 3인칭화하는 것은 바로 이 위상의 분리에서 기인한다. 이전 글인 ‘폴라리스 랩소디를 분석해보자’에서 필자는 바흐찐의 이론을 빌어 인간에겐 ‘나를 위한 나’와 ‘타자(他者)를 위한 나’라는 두 가지 나로서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미는 ‘나를 위한 나’가 부재한다. 미는 이미 자신의 시공성(Chronotope, Хронотоп)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 즉 ‘미래를 걷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미-육체)을 ‘과거를 보는 것을 통해’ 쉽게 타자화한다. 미-정신이 보았을 때 ‘미’라는 인간은 이미 완결된 이미지를 가진 완성된 인물이고, 따라서 미-정신은 미-육체를 ‘미’라는 이미 (미-정신에게는) 완성된 인물로 완성시키는 것을 목표한다, 마치 배우가 극의 캐릭터를 완성시키듯. 미가 할슈타일 후작에게 오열하며 한 말과 미가 스스로를 3인칭으로, 타자를 부르듯이 칭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미는 ‘실존’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미의 위상분리는 ‘시간 정지’라는 환상적인 사건으로 인해 해소되고, 그래서 작품의 종반부에 미는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한다. 할슈타일 후작과의 대화에서 미는 두 번 이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데, 두 단어의 시점은 확실히 다르다. 첫 번째로 ‘내가 미래를 만드니까’라는 말에서의 ‘나’는 미-정신을 지칭한다. 퓨처 워킹을 통해 먼저 미래를 걸어본 미-정신은 미래를 만든다. 그러나 할슈타일 후작이 ‘미가 파에게 미래를 빼앗겼고, 따라서 미래를 만들 수 없다’고 지적했을 때, 미는 그것을 긍정한다. 미의 미-정신과 미-육체는, 미-정신이 더 이상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기 때문에(즉 미래를 걷지 않기 때문에), 합일된다. 그녀는 이 정신과 육체의 합일에 의해 자신을 제3자로 여기지 않으며, 비로소 ‘실존’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그녀는 할슈타일 후작의 질문(너는 누구지)에 ‘나는 인간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제 온전한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고(‘나를 위한 나’를 되찾게 된다고 해도 되겠다), 동시에 ‘현존재’로서 ‘지금․여기에 실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2. 파: 미-정신과 미-육체의 교차점, 결과와 행위의 교차점
미의 위상의 분리는 작품 내에서 ‘신스라이프의 문제’로 단적으로 표현된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그 교차점을 찾아오라.’ 할슈타일 후작은 ‘과거로 향하는 흐름’을 시간으로, ‘미래로 향하는 흐름’을 현재로 파악하고, 그 교차점이 퓨처 워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미의 퓨처 워킹의 정체와 그로 인한 미의 위상분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로 향하는 흐름’이 미-정신(미-정신은 미래를 걸으면서 그보다 과거인 미-육체를 제어하므로), ‘미래로 향하는 흐름’이 미-육체임을 알 수 있다. 파에게 문신을 행하며 그녀를 ‘준비시킨’ 행동은 미의 다른 모든 행동과는 다르게 그녀가 ‘결과를 알고나서 행한’ 것이 아니다. 미의 그 악명 높은 거꾸로 된 대사에서 그녀는 ‘파를 준비시킨 것’이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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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흐르는 미-정신과 미래로 흐르는 미-육체가 유일하게 일치를 이룬 행위인 문신 행위, 바로 그 행위의 대상인 파가 ‘신스라이프의 문제’의 답인 ‘교차점’이다. 그런데 이 ‘교차점’이라는 말은 단순히 ‘미-육체와 미-정신의 일치점’만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의미의 확장은 작품의 후반부에 다시 설명된다. 다시 한 번 발레리 신스라이프의 말을 빌려와야 할 것 같다.
“순서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자꾸나. 인과라는 말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좋아. 인과라고 해두자.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겠지. 여기엔 순서가 있다. 결과가 먼저 발생하진 않아. 원인이 먼저 발생하지. 그렇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일어날 테니. 아까 말했던 한 사람의 삶의 모습 같은 것도 이와 같지. 열심히 일한 것이 원인이고 안락한 노후생활이 그 결과일 거야. 알겠니?”
“좋네요. 이해해.”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의 흐름을 보면 그 순서가 이상하게 바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단다. 그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행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그 결과를 즐기고 있단다.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예상되는 결과가 시원찮군. 관두는 것이 낫겠어. 잘 보렴. 이 때 그 사람은 행위에는 관심이 없어. 결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아직은 존재하지도 않는 그 결과를 사람은 앞당겨서 즐길 수가 있어.”
“아아.”
“그리고 결과가 일어났을 때를 보자꾸나. 그는 이제 행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것이 뉘우침이든 즐거운 회상이든 상관없어. 그는 결과가 아닌 행위를 생각하고 있지. ‘젠장,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되는데.’ 혹은 ‘만약 그 때 이러했다면.’
‘그렇게 했기에 가능했지.’ 등의 말들이 그것인데, 이런 말 속에 담겨있는 감정은 좀 다를지 몰라도 행위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는 차이점이 없단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그 때의 그 행위를 즐기고 있는 거지.”
“아아. 그렇네.”
“순서가 바뀌어있다는 것을 알겠니?”
(...)
“시간과 하나가 된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발?”
“시간은 멈추지 않아. 멈추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지. 그렇다면, 시간과 하나가 된다면 신스라이프 역시 멈추지 않게 될 테지. 아까 인간이 시간을 만들어낸다고 말했지?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시간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거지. 그는 모든 인간들의 아이가 되려는 거지. 어떤 인간의 부모도 되지 않은 채.”
“부모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여자의 몸이 되었어. 그 정신은 남자지. 그는 단일체고 자기완결단위이고 생식을 거부해. 그래. 그는 영원한 아이가 되는 거야. 그의 부모인 모든 인간이 시간을 만들어낼 때 아이인 그는 시간을 만들지 않겠다는 거지. 모든 인간들이 결과를 위해 행위를 할 때, 그는 부모의 재산을 받는 자식처럼 그 결과를 상속하겠다는 거지.”
“울 거야. 모르겠어.”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말하련다. 그는 인간들이 행위할 때 즐겨야할 결과를 혼자 가져가버릴 거야. 그래서 시간이 멈추는 거야. 결과가 오지 않는 거지. 그것은 모두 신스라이프에게 돌아가 버리거든. 인간은 영원히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시간은 신스라이프에게 상속될 거야. 인간 스스로에게 돌아갈 시간은 남지 않게 될 거야.”
“그럼 왜 프리스트들은 구덩이 속으로 자기 몸을 던진 건데요?”
“행위와 동시에 결과를 받을 수 있는…… 자살이란다. 키스와 춤과 노래와 마찬가지야. 웃기지? 사람이 거꾸로 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그들은 자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자기의 삶을 정지시켰단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지시킴으로서 신스라이프에게 위탁했던 자신의 시간을 되찾게 된 거지. 그게 내가 말했던 추측이란다.”
발레리 신스라이프의 말을 자세히 뜯어보면, ‘과거로 향하는 흐름’이 ‘결과’이고 ‘미래로 향하는 흐름’이 ‘행위’임을 알아챌 수 있다. 결과는 인간에 시간적으로 앞서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간에게 ‘다가온다.’ 반대로 행위는 이미 종료되어 과거가 된 상태에서도 자꾸만 인간에게로 ‘거슬러 올라온다.’ (이상의 논의는 하이데거의 시간 개념에서도 이미 설명된 바 있다. 미래에 자신을 내던짐은 결과를 위한 것이고, 과거를 유의미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좀 더 작품 내에서 사용된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위의 설명을 반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행위와 결과의 교차점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와 결과의 결합, 즉 ‘시간과 하나됨’이다. 행위와 결과가 영원히 결합된다는 것, 영원히 시간과 하나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원히 지금 이 순간을 탐닉한다는 것이다. 신스라이프와 한 몸에 결합되는 것은 그래서 작품 내에서 ‘인간이 과거와 미래를 잃고, 현재에만 답보하고 지금을 탐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알게 되면, 파가 신스라이프가 내민 손을 받아들인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쳉과 미의 미래를 지켜볼 수 없게 된 파는 신스라이프와 결합함으로써 그 미래를 미에게서부터 ‘빼앗아’ 가는 것이다.
‘누가 너로 하여금 시간을 멈출 수 있게 해줬느냐! 누가 너에게 그런 힘을 줬느냐, 추억이 더 이상 멀어지지도 잊혀지지도 않게 하고, 보고 싶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줬느냐!’
2.3.1. 신스라이프: 시간을 버리다, 은폐된 존재
더 이상 실존하지 못하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사실 실존은 인간이 ‘현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존재를 위한 조건은 아니다. 광물, 식물, 동물들은 실존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단지 그들은 자신의 존재가 당연한 것이므로 그것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간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방식은 인간 역시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파는 레이저에게 그가 ‘시간을 버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당신은 조금 전 자신의 입으로 말했어요. 당신이 쓰레기였다고. 그리고 당신은 도박사에요. 그럼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어요. 뻔하죠. 숙취에 찌든 머리를 흔들며 늦으막하게 일어나요.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가야할 곳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과 낭패감이죠.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도 함께 찾아올 테고. 그리고 당신은 마법사더군요. 습관적으로 마법을 메모라이즈하는 일을 하겠군요.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면서. 그리고는 스스로 비참해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믿는 것처럼, 혹은 누구나 다 그렇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음식을 찾아요. 구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먹는 일에 모든 관심을 쏟아요. 구하지 못했을 경우 공복이 당신의 머리를 설령 맑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 맑아진 머리로 할 일은 없어요. 그 때부터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저녁의 도박판이 벌어질 때까지의 시간들을 어떻게든 치워버리는 것이겠죠.”
고통과 부상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지만 레이저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정말 정확해!’ 그리고 레이저는 그런 자기기만을 생각하는 자신에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싶을 거에요. 그 지루한 시간들을 누가 치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루 왼종일 도박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죠? 그리고 다른 도박사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에요. 가끔은, 아주 가끔은 비슷비슷한 작자들을 모아놓고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도박만 칠 때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죠. 대부분의 나날에서 당신은 지루함과 심심함에 몸부림치며 저녁 시간을 애달프게 기다리고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마침내 지쳐빠진 정신으로 도박판에 끼어들게 되는 거죠. 술에 좀 취했을 수도 있고. 그리고는 그 지긋지긋한 도박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박을 하는 거죠. 카드 한 장을 잡을 때마다 자신을 기만하면서.”
“이봐, 꼬마 아가씨……”
“무슨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었는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있어요. 말해봤자 난 듣지 않을 테고, 당신에겐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겠군요. 도박판의 그 초조감, 숨 막히는 느낌, 긴장감, 담배연기, 뒤섞여 춤추는 카드들이 정말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도박판이 끝나고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야 할 때, 당신은 가끔은 생각하겠죠.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면서 쓰러져 잠드는 거죠. 다시 처음부터 시작될 것을 알면서.”
파는 슬픈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의 시간들을 누군가에게 보내고 있었죠?”
“그래.”
레이저는 이상할 정도로 명확한 자신의 발음에 놀랐다. 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나날들이 결국은 시시하게 끝날 것도 알고 있었죠? 도박판에서 사는 만큼, 언제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거나 혹은 당신 스스로 자신을 죽이게 될 것을 알고 있었죠? 혹은 늙어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살해당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겠죠?”
“그래.”
“나도 그래요.”
이렇게 시간을 버리고,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상황을 하이데거는 ‘존재가 은폐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존재는 시간을 전제로 하며, 존재자(정확히는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할 때,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물으며 실존할 때,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열려 밝힌다.’ 그리고 이렇게 실존할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현존재가 된다. 작품에서는 여러 인물의 입을 빌려 인간의 본질적인 삶의 방식인 ‘실존’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 나라에는 챠넬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 그 분께서 행동과 상황의 관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신 것도 아십니까?”
“상황을 호전시키는 행동은 최상이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은 나쁘지만,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는 행동은 최악이라고 하셨지요.”
“그 분은 전략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그 때 그 분은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시간의 본질을 말씀하신 듯합니다.”
“시간의 본질이오?”
“우리는 흘러야 합니다.” (칼, 함)
‘너희는 흘러야 하니까.’
‘뭐?’
‘싸움에 이길지 질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계속 싸워야 하지 멈추는 것은 너희답지 않으니까. 너희는 바람, 너희는 강물. 움직이고 번성하고 영원히 행동해야 하겠지.’ (프림, 샌슨)
레이저는 신스라이프의 앞에서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관심을 동시에 받는 인간만의 산물’이라는 명제를 거부하고(즉 ‘저울눈을 속이고’) 오크와 거인의 시간을 신스라이프에게 심판의 잣대로 들이대지만, 그 자신이 ‘시간을 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신스라이프에게 자신의 시간을 위탁하는 꼴이 되어 패퇴하게 된다.
2.3.2. 신스라이프: hjan, 아직·미처, 완성에의 욕망
레이저처럼 시간을 버리지 않음에도 신스라이프에게 자신의 시간을 위탁하는 존재자들이 있다. 파하스, 솔로처 등 죽었지만 되살아난 존재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작품에선 그들이 hjan을 가졌기 때문에 되살아났다고 표현된다. 신스라이프는 아일페사스에게 그들이 ‘시간을 끝없이 만들어내길 원한다’고 말한다. 앞서 살펴본 바를 이용해서 우리는 이것이 ‘그들이 끝없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바라고 있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hjan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시제는 ‘아직·미처’라고 말할 수 있다. 아직 다 하지 못했는데, 미처 끝마치지 못했는데, 라는 감정이 hjan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그덴 산의 주인은 ‘미처 나의 그덴 산으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솔로처는 ‘아직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했는데’ 죽었기 때문에 되살아난다. 미래에 일어날 결과를 지금 이 순간으로 끌어오고 싶은 욕망, 바로 ‘완성에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을 멈추고 싶어했고, 그래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되살아난 후에도 자신이 이미 ‘죽음으로써 완성되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채고 있으며, 마지막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hjan의 승화를 경험하고 ‘완성됨으로써’ 신스라이프에게서 자신의 시간을 되찾는다. 그러나 아직 ‘죽음을 통한 완성’을 경험하지 않은 존재자들은 타자(他者)에 의한 자신의 완성을, 즉 죽음을 납득하지 못하고 신스라이프를 받아들이게 되며(“그리고 이 시간의 모든 자들은 나를 지지한다. 그들에게 물어보라. 죽고 싶은 자 누구냐고. 이미 죽었던 자가 아니라, 지금 시간을 만들어내는 자들 말이다. 지금 저기서 벌레 같은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저 도박사 놈이 가장 가까이 있는 본보기인 것 같군. 저 놈이 살기 위해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란 말이다!”), 이로 인해 레이저와 할슈타일 후작은 신스라이프를 심판하지 못한다.
3. 할슈타일 후작, 미와 쳉, 파하스와 네리아: 완성된 행위, 사랑과 예술
그러나 신스라이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행위가 바로 후에 드러난다. 할슈타일 후작은 시간에 파묻히지도 시간을 의식하지도 않는,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행위만을 위한 행위 혹은 행위가 곧 결과인 행위를 통해 신스라이프를 위협한다.
할슈타일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아일페사스는 알 수 있었다. 키스할 때 누가 누구의 입술에 먼저 닿았는가 하는 순서가 없는 것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행동하며 동시에 결과를 가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작의 공격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일한 동작 속에 단일한 의미가 단단히 응결되어 있는 행동이었고 그것이 목표를 맞췄는가 맞추지 못했는가, 즉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의미를 따질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기에.
이러한 ‘즉각적인’, ‘완성된’ 행위는 작품 내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사랑’이다. 미가 어떻게 쳉에게서 ‘시간을 받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쳉의 사랑(그리고 그것의 표현이 될 수 있는 모든 행동)은 ‘결과를 의식하지 않는’, 미를 위하는 것만이 수단이자 목적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있어서 수여자(이 단어가 적절한지 잘 모르겠지만)와 수혜자의 구분은 없다. 그러므로 쳉의 행위 속에는 신스라이프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나가 사랑이라면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우리는 네리아가 파하스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랑만큼이나 지금 이 순간을 위한 행위, 행위와 결과 그리고 즉자와 대자가 구분되지 않는 행위는 바로 ‘예술’이다. 이에 대한 암시는 작품 내에서도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발레리 신스라이프는 아일페사스에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행위’의 예로 키스(사랑) 말고도 춤과 노래(예술)를 제시한다. 쳉의 사랑은 ‘미를 기다리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파하스와 네리아의 눈에 하나의 ‘춤’처럼 보인다. 신스라이프를 향한 할슈타일 후작의 검술과 걸음걸이는 차라리 ‘춤과 비슷하다.’ 카타르시스는 극이 끝난 후 캐릭터와 관객이 서로 분리되었을 때에 느끼는 감정이지, 극이 진행되는 도중에 느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그것의 바깥에 있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의미의 층위를 가지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 독립적이다. (이러한 예술론이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의 예술이나 건축 등의 실용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예술에 대한 또 다른 논의가 될 것이지만 이 글에서는 과감히 무시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예술을 논할 때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이다. 판타지 문학도 이러한 의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에 더욱) 결국 예술은 앞에서 살펴본 사랑과 마찬가지로 ‘완성된 행위’가 된다. 그래서 작품 내에서 쳉의 사랑은 예술의 영역에 발을 걸친 것 같아 보이고, 자신의 노래에 참여해달라는 파하스의 요청이 네리아에게 마치 ‘안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4. 결론
결국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퓨처 워커’는 시간을 주제로 한 소설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저서를 빌어 말하자면, ‘존재와 시간’을 위한 소설인 것이다. 그리고 타자(打者)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퓨처 워커’는 웅변하는 소설이 아니다. ‘퓨처 워커’는 딱히 ‘인간은 실존하며, 존재를 열어 밝혀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은 실존하는 존재자이다’라고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인간이 흘러야 한다고 해서 레이저와 같은 인간들이 (인간도 아니라고?)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시간을 버리기도 하고, 완성을 바라며 시간을 지연시키기도 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하고, 시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마지막의 미, 파, 신스라이프의 최후의 화해는 아마도 그런 시각에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보고 있나요,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고함질렀다. “파!”
인간은 미에게도 시간을 보내고 있군요. 쳉이 그녀를 안내했고, 그리고 인간이 그녀를 이끌고 있어요.
신스라이프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웃는 거야? 그들이 나를 포기했다는 건가? 좋아! 이런, 빌어먹을! 몇몇 얼간이들이 그에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 나는 존재하고 있어! 제기랄, 그건 나를 원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아니오.
“아니라니, 뭐가 아니라는 거야? 나를 원하는 놈은 없다는 거냐?”
아니오. 그들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뭐야?”
미를 보세요.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어깨로 숨을 쉬며 외쳤다. “오래 보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곧 없애버릴 테니까!”
미를 보세요. 부정하지 말고. 그녀는 당신에게 오고 있어요. 뒤로 돌아가고 있지 않아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그거야 너 때문이겠지! 어리석게도 너와 내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속에서 무엇인가가 조용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기도를 타고 넘어가는 빛의 질감을 아프게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손을 들어올렸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서. 파는 더욱 낮게 속삭였다.
인간은 정말 당신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나에게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는 목구멍을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속에서부터 시작된 부서짐은 이제 눈물이 되어 샘솟았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를 생각했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알아. 그래. 그들은 알아.”
네. 신스라이프. 고마워요.
“……파. 너는……”
같이 가요.
“난, 난……”
가요. 신스라이프. 나와 같이. 그녀에게 걸어가요.
신스라이프는 앞으로 걸었다.
얼어붙은 대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광선들이 춤추는 하늘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위를 메운 빛 속에 시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타성이 걸음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걷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미는 미소지었다. 선망은 인고를 수놓는 장식이었고 희구는 과거를 위한 이름이었다.
미는 걸어갔다.
신스라이프는 걸어갔다.
파하스는 기어코 하프현을 다 끊어놓았다.
네리아는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머뭇거리는 쳉의 손을 잡고 미친듯이 춤추고 있었다.
신차이는 수평선을 향해 파이프 연기를 날려 보내었다.
에카드나는 자신의 몸을 꿰뚫는 데스나이트의 검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는, 그 검의 소유주를 향해 부러진 칼을 힘겹게 휘두르다가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카알은 술잔을 들어 올려 샌슨의 잔과 부딪히며 껄껄거렸다.
함은 눈앞에 펼쳐진 사막을 향해 희열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시오네는 울었다.
이루릴은 모든 정령을 향해 웃음지었다.
엑셀핸드는 운차이가 자신을 끌어안으려 드는 줄 알고 기겁했으나, 운차이의 목적이 단지 그의 허리에 매달려있던 담배쌈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격노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운차이는 제레인트의 팔을 조용히 끌어당겨 엑셀핸드의 주먹을 침착하게 막아내었다. 제레인트는 졸도했다.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를 생각했다.
돌맨은 그란의 품에 안겨 숨이 막히도록 울고 웃었다.
궤헤른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가이버가 그를 불렀지만 궤헤른은 듣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다시는 부르지 않으려 했던, 그리고 부를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후작님.”
미는 멈춰섰다.
신스라이프는 멈춰섰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왼손을 내밀던 미는 푸훗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고 그런 미를 보며 신스라이프는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5. 사족: ‘퓨처 워커’ 비판
이상으로 ‘퓨처 워커’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작품인지 알아보았다. 필자의 해석이 다른 독자들을 완전히 납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따라서 작품을 즐기는데 있어서 또 다른 실마리를 건넬 수 있다면 이 글의 의의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닫기 전에 필자는 ‘퓨처 워커’에서 한 가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발레리 신스라이프와 아일페사스의 대화이다. 발레리 신스라이프와 아일페사스의 대화는 ‘퓨처 워커’를 해석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건네지만, 이 대화 자체는 어떠한 복선이나 계기 없이 불쑥 등장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설명을 위한 설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퓨처 워커’에서는 이 대화만큼 강렬하진 않더라도 그러한 인상을 주는 장면이 몇몇 더 있어 보인다.
또한 이 역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즉 주제의 흐름과 상관없다고 판단되는 사건들이 스토리의 진행을 위해 나타나기도 하며, 이러한 사건들은 ‘퓨처 워커’가 자신의 주제를 충분히 표현했다고 타자(打者)가 판단하자마자 황급히 종결된다. 즉 주제적으론 완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는 완결되지 않아 오픈엔딩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사건들은 주제의 흐름에 전혀 동떨어지지 않아 있으며 주제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연결고리가 너무 눈치 채기 힘들 정도라 독자가 쉽게 납득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의 나태함에 기인하는 것인가?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 by | 2012/04/05 00:37 | books | 트랙백 | 덧글(0)
이 글은 타자의 세 번째 작품인 ‘폴라리스 랩소디’를 자세히 읽어보는 글...이고 싶지만, 필자의 실력과 기분에 따라서 글이 얼마나 자세하고 짜임새 있을지 미지수인 글이다. 우선 첫머리를 쓰는 필자가 가진 마음속의 목표는 ‘폴라리스 랩소디’를 분석함을 통해 이영도 글에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지만 역시 글이 끝나는 시점에 이 글이 어떻게 결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글의 분석은 하나의 시각에 핀을 꼽고 그것에서부터 작품 전체를 통일성 있게 살펴보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하...지만 물론 이것이 얼마나 잘 지켜질지는 글이 끝나봐야 알 것이다.
그러면 우선 ‘폴라리스 랩소디’가 어떤 작품인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하지만 모두들 아는 스토리이니 간단히 요약하도록 하겠다. 카밀카르 왕가 셋째 공주 율리아나 카밀카르는 제국의 공적 1호 키 드레이번에게 납치되었다가, 그의 해적선에서 일하던 노잡이 노예 오스발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한다. 이 사건이 키 드레이번의 분노를 사고, 그들의 도망과 추적의 행보가 시작된다. 그리고 (오스발을 제외하면) 제국 내의 모든 권력집단이 흥미를 가지는 이들의 피신행·추적행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에 의해 제국과 혼 족, 그리고 심지어는 판데모니엄의 일곱 하이마스터까지 연루되는데...
마치 책 뒤에 쓰여 있는 요약문처럼 되어버렸는데, 스토리를 간추리는 게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썼다. ‘폴라리스 랩소디’는 하나의 사건이 그것에 선행하는 사건의 필연적 결과가 되는, 플롯 상으로 매우 정교한 소설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분석의 과정에서 스토리 설명은, 작품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하자. (어차피 이 글 볼 사람은 스토리 다 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읽어본 이들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폴라리스 랩소디’는 자유와 복수에 대한 고찰을 담은 작품이다. 물론, 이 자유와 복수는 ‘폴라리스 랩소디’ 내에서 그 의미가 전용된다. (국어사전에선 ‘복수’라는 단어가 ‘폴라리스 랩소디’ 내에서처럼 쓰이진 않는다. 보통 원한이나 증오와 같은 감정이 수반된 앙갚음을 의미한다) 즉, 작품 내에서 자유는 타인의 영향을 일절 받지 않는 상태를, 복수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타인에게 그것과 같은(혹은 동등한)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유-복수의 이항대립은 작품 내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본인-당신(데스필드), 에고이즘-앨트루이즘(율리아나), 왕정-공화정(바스톨), 폴라리스-혜성(율리아나), 새장을 엶-새장을 닫음(키 드레이번), 인효적 효력-사효적 효력(교회). 오스발과 율리아나의 대화 중 하나인 ‘긍정된 자신’과 ‘부정된 자신’ 역시 이 대립에 들어맞지는 않으나, 연관하여 생각해 볼만한 것이긴 하다. 또, 바탈리언 남작과 오스발의 대화에 등장하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중립적 기호인 말이 가진 한계에 대한 언급 또한 작품의 전체적 주제에 비춰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두 대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봐야하지 않겠는가? 이 의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곳으로, 작품 내에 나타나는 이 대사를 꼽아보겠다. “그들은 이 세계에 살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는 있지만 생존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나라면 이런 식으로 살겠다는 거죠.” 오스발의 이 말은 ‘자유냐 복수냐’에 대한 하이마스터의 투표를 설명할 때 나타난다. 이것은 ‘자유’나 ‘복수’가 인간(혹은 악마)의 생존방식이자 ‘존재방식’의 두 가지 양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결국 ‘폴라리스 랩소디’는 ‘드래곤 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론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인간존재의 본질을 타자(打者)는 ‘자신’과 ‘타자(他者)’로 (일단은) 구분지어 놓고-앞으로 打者와 他者는 읽는 사람이 스스로 잘 구분해서 읽으시길-, 이 두 본질이 어떻게 인간 속에서 공존하는가, 이 두 본질이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승화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매 작품마다 던지고 있다. (‘완전성’을 매 작품마다 걸고넘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타자가 참고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타자의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상가는 바로 미하일 바흐찐이다. 바흐찐의 존재론을 간략히 살펴보자. 그는 인간이 두 가지 존재론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나를 위한 나'라는 측면과, '타자를 위한 나'라는 측면이 공존하며, 이 두 ‘나’는 하나의 주체 속에 ‘상보적으로(complementarily)’ 존재한다. ‘나를 위한 나’는 자유이고, ‘타자를 위한 나’는 속박이다. 자유는 스스로가 자신을 정의하려는 것이며, 타자의 나에 대한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다. 속박은 타자가 그의 시선에서 나를 정의하려는 행동이다. 타자는 끊임없이 나를 평가하며, 나를 ‘과거에서부터 현재’의 축적물로서 고정시키려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현재에서부터 미래’의 가능성의 산물로서 벗어나려고 한다.
좀 더 자세한 이해를 위해 바흐찐의 ‘대화성’ 개념을 한 번 훑어보기로 하자.
“(...) 분명한 것은 대화성의 기본 원리가 개별적인 의식을 소유한 개인들 간의 시각의 차이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각의 차이는 개인이 점하고 있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즉 시공성(Chronotope)에 근거한다.
바흐친이 보는 인간은 구체적인 시공간을 점하며 그로 인해 독특한 자신만의 시각을 가진 개성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인간의 시각에는 항상 사각(死角)이 존재한다. 인간이 자신의 시각으로 볼 수 없는 곳, 그 사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의 ‘지평선’을 통해 상대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이미지를 ‘완결’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관찰자가 대상의 외부에 위치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관찰자 자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볼 수 없다. (...) 따라서 인간은 상대에 대한 이미지는 ‘완결’시킬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의 ‘완결’된 이미지는 얻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바흐친이 주장하는 타인의 중요성이 있다. 타인은 ‘나’의 외부에 존재함으로써 ‘나’에 대한 전체적 이미지를 조망하고 ‘나’를 ‘완결’시킨다. 결국 ‘나’의 이미지가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은 타인에게 있는 것이다.
(...)
바흐친의 인간은 서로의 시각을 교환함으로써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비자족적이며 대화적인 존재이다. 자기 충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타인을 필요로 하고 그로 인해 대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인과의 만남, 대화를 통해서 인간은 자기 인식을 형성하고 삶의 의미를 성취한다. (...)” (이강훈, “조이스와 바흐친 - 스타일과 미학의 만남”, 동문선:서울, 2007, pp.22~24)
다시 한 번 요약해보자. ‘나를 위한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고치고, 재정의하고, 가능성에 의해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럼으로써 앞으로, 위로 발전하거나 뒤로, 밑으로 퇴보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변화하거나 추구하려는 의지이다.’ 그러나 ‘타자를 위한 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타자가 내리는 자신에 대한 정의와 평가를 수용하고, 옆으로 조화를 이루며 ‘퍼져나간다.’, 즉 그것은 ‘고정되거나 안정되려는 의지이다.’
조악하게나마 바흐찐의 존재론을 필요한 만큼만 언급해보았다. 자, 이영도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유와 복수’(폴라리스 랩소디), ‘자아와 타자’(드래곤 라자)의 개념과 바흐찐의 ‘나를 위한 나-타자를 위한 나’의 개념을 비교해보자. 서로 상당히 유사하지 않은가? 인간이란 자신을 타자에게 투사하기도, 자신에게 타자가 투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타자로부터 벗어나려하거나 소외되기도 한다. 이는 한 인간 내에 ‘나의 영역-타자의 영역’이 상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자로부터의 자신에의 영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타자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며 동시에 ‘불안정한’ 사람이다. 반대로 수동적으로 타자를 받아들이기만 할 뿐 능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의 영역’을 거부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속박된’ 사람이다. ‘폴라리스 랩소디’를 포함한 타자의 작품은 인간이 가진 이러한 두 존재방식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고, 이 대립적인 존재방식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개인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다른 모두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어느 작품에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이 비슷한 언급이 ‘천지척사’ 부분에서 라수에 의해 나온다)를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시도해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물론 맨 마지막 것은 타자 스스로도 어찌할 수가 없으니 완전성이니, 두 개의 태양이니 하는 말로 모호하게 얼버무린다. 사실 타자의 작품에 나오는 완전성은 1만 6천년 지나도 달성 못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인간이 멸절할 때까지 불가능)
자, 이제 작품 해석의 전제가 되는, 작품의 중심적 주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주제에 기반을 두고 작품을 세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맨 처음에 말했던 것 같은데, ‘폴라리스 랩소디’는 매우 정교하게 짜인 플롯을 가진 소설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연히 타자가 사건을 필연적인 연쇄로 아주 정교하게 짜 맞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플롯이 잘 짜인 것은 타자가 작품 내의 인물들에 대해 아주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한 사건의 장본인·당사자는 그 사건에 대해 자신이 가진 캐릭터에 부합되는 반응을 보여주어야만 필연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폴라리스 랩소디’에는 (지엽적인 에피소드를 제외하고) 전체적인 스토리에 있어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 없다. 각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신이 가진 정보에 의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고려해 합당한 최선의 행동을 취한다. 마치 장기의 고수들이, 의외의 수가 나오지 않을 경우, 초반에 행마를 정형화된 순서대로 가져가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자신의 정보와 상대방의 정보가 다를 경우, 다른 판단의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 행동들도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극도로 합리적인 것은 마찬가지. 단지 그 합리적 판단의 결과가 세실이나 트로포스 선장의 마법과 같은 캐사기적인 사건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흠좀무. 그러나 판타지니까 가능... 퍽!) 그러므로, 타자는 사건에 관여하는 각 인물들을 잘 파악하고, 그들 캐릭터에 부합하는 합리적 행동들을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타자의 작업은 이미 말했듯이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필자는 이 성공의 이유들 중 하나로 ‘캐릭터를 극도로 정형화시킴으로써, 플롯 전개에 있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을 “캐릭터에게 부여된 관념”이라는 틀 안에 제한시키고 돌발행동을 억제한 것’을 들고 싶다. 커다란 스토리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이 매우 강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들 개인의 개성을 뛰어넘는 특정한 관념을 작품 내에서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각각에게 주어진 관념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인물들, 즉 스토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인물들에게 분유된 관념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봄으로써, 이들의 개성을 더 잘 이해함은 물론, 앞서 언급한 타자의 주제가 나타나는데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알아볼 인물들은 오스발, 율리아나, 키 드레이번, 그리고 자유와 복수를 대표하는 각각의 7인들(자유-로네스, 휘리, 파킨슨 신부, 퓨아리스 4세, 데스필드, 세실, 바스톨. 복수-오닉스, 킬리, 돌탄, 하리야, 알버트, 트로포스, 두캉가)이다. 하이마스터에 대해서는 7쌍의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같이 언급하기로 하고, 다른 인물들은 스토리의 진행을 위해 힘써주긴 했지만 필자가 언급한 작품의 주제에는 크게 기여하지 않으니 제외하도록 한다.
우선 인물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살펴보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자유’측 인물과 ‘복수’측 인물이 작품 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자유측 인물들이 각각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세력의 대표자들임에 반해, 복수측 인물은 폴라리스라는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작품 내에서 ‘자유’와 ‘복수’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자유측 인물은 타인의 간섭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들이다(그것이 세력을 키우는 것이든, 세계의 정치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든, 아니면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든 말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유는 나 안의 ‘나의 영역’을 중시하려는 존재방식이며, 따라서 이들 인물들은 행동에 있어 능동적이고 발전적이다. 이러한 성향에 알맞게 그들은 계급 사회 내의 가장 큰 권력자이거나(로네스, 휘리, 퓨아리스 4세, 바스톨), 아니면 타인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한 개인이다(파킨슨 신부, 데스필드, 세실). 반대로 복수측 인물은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있으며, 개인의 목표를 추구하기보다는 공동체의 존속을 가장 우선시한다. 일곱 선장들은 나 안의 ‘타인의 영역’을 중시하는 존재방식을 택하고, 그래서 그들은 조화를 추구한다. 이들의 이러한 성향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바스톨과 두캉가의 대화이다. “(...) 아, 듣기로 해적들은 공화주의자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두캉가 선장은 코밑을 쓱 문지른 다음 실쭉 웃었다. “공화주의자? 흐음. 뭐 따지고 보면 공화주의자이긴 하지요. (...)” 정말로 의외이지만, 공화정 국가의 장군인 바스톨은 오히려 ‘군대’라는 계급 사회의 최고 권력자이며, 그 스스로가 내심 자신을 ‘긴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반대로 두캉가는 ‘공화정적인’ 해적단의 선장이며 동시에 폴라리스 ‘평의회’의 일원이다.
자, 이상의 사실을 유념한 상태에서 각 인물의 행동을 한 번 분석해 보도록 하자. 이 분석은 각 인물을 ‘자유’와 ‘복수’라는 두 개념 중 어느 쪽에 서 있는지 알아보고, 그 근거를 작품 내에서 찾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윗 문단과 아래의 분석에서 여러 비판이 쏟아질 것이라 예상하긴 하지만, 필자가 뒤에서 알아서 갈무리할 생각이니, 글을 다 읽고 나서 비판을 시작해주길 바란다.
우선 직스라드와 관련된 두 명인 발도 로네스와 오닉스 나이트에 대해 알아보자. 각각 하이마스터에 의해 공포를 모르는 자, 공포에 사로잡힌 자라고 불리는데, 이 별칭에서부터 그들이 가지는 능동성과 수동성을 알 수 있다. 로네스는 바스톨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냉정해야 할 때라고 말할 때 분노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아갈 거라 믿을 때 멈춰’선다고 평가되는데, 그의 독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오닉스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온갖 미신과 저주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렇다, 오닉스는 할아버지나 해줄 것 같은 옛이야기를 진짜로 믿는 (골려먹기 좋은) 순수한 아이였던 것이다... 충공깽. 어쨌든 오닉스의 수동성은 작품 내에서 잘 묘사되진 않은 듯 싶은데(그렇다고 오닉스의 능동성이 보이는게 아니다. 그냥 출연분량이 적을 뿐이다. 안습), 아마 그래서 작가는 그의 수동적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해 말을 못하는 설정을 도입하지 않았나 싶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제한적 발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가 의사소통을 손짓으로 할 수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나, 사실 손짓은 노스윈드 선단(혹은 뱃사람들)에게나 통하는 소통 방식이다. 즉, 그는 남의 말을 받아들이긴 하나 그만큼 자기의 말을 내보낼 수는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완전한 개성이 ‘노스윈드 선단’이라는 공동체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 번째 쌍은 벨로린과 연관된 두 인물인 휘리 노이에스와 킬리 스타드이다. 그들은 각각 불꽃으로 노래를 태우는 자와 노래의 불꽃을 지피는 자로 일컬어진다. 휘리는 반왕인 율리아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자신의 무대를 위한 소품으로 생각하는 이이다.(그에게 있어 정복전쟁은 자신의 ‘무대’이며, 다른 이들은 예기된 것이든 예기치 못한 것이든 그의 무대의 조연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무대를 속행하기 위해 메르데린 공작을 살해하기도 한다) 반대로 킬리는 과거엔 명령을 ‘충실히 받는’ 사략선 선장이었고, 현재는 누구보다도 키 드레이번을 따르는 해적이다.
바스톨 엔도와 두캉가 노보 역시 저러한 대립쌍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밤의 시작에 선 자’와 ‘낮의 끝에 매달린 자’인 그들은 라오코네스의 선택지인데, 바스톨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군인 계급의 최상위 권력자이며, 공화정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을 무의식중에 ‘긴 선’으로 여기는 자이다. 반면 두캉가는 자인했듯이 ‘닻을 주고 돛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남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인물이다.
세실리아와 트로포스는 아델토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가장 작품 내에서 정보가 없는 편이다. 그들의 별칭은 각각 ‘지지점’과 ‘지렛대’로, 그들이 가진 ‘자유’와 ‘복수’의 성격은 그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세실은 (처음 교회에서의 교전을 제외하면) 키 드레이번을 돕기 위해서만 마법을 사용하는데,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그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트로포스는 조금 다르다. 그는 마법을 쓰기 전에 한 마디를 던진다. “죽는 것이 싫은가, 마법이 싫은가?” 그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미증유의 위기와 공포를 무시하고 마법을 사용한다. 즉 그 역시 ‘자신’을 정의할 때 자신의 ‘공동체’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데스필드와 알버트 넥슬러는 기릭스와 관련된 인물로, 각각 ‘움직임에 못박힌 자’와 ‘못박혀 움직이지 않는 자’이다. 데스필드는 조금만 살펴봐도 그가 얼마나 독립적인 인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며, 그의 특유의 말투인 ‘본인-1인칭’과 ‘당신-그 외’는 바로 그의 이러한 인식에서 기인한다. 그와 타인을 연결시키는 끈은 오직 의뢰뿐이며, 언제나 패신저를 위해 ‘자신의 패스’를 긋는다. 다시 말해 수혜자는 전적으로 패신저이긴 하지만, 패스는 언제나 ‘본인’이 긋는다. 알버트는 작품 내에서 ‘못 박힌 키 드레이번’이라고 불리면서 그 정체성이 명확해지는데, 필자는 그에 대한 분석을 나중에 나올 키 드레이번에 대한 분석과 함께 하고자 한다. 물수리호를 지배하는 알버트와 노스윈드 선단을 지배하는 키 드레이번은 주제적인 측면에서 굉장한 유사성을 보이며, 특히 이들의 분석이 타자의 다른 작품들(‘드래곤 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만은 미리 언급하고 넘어가자. 알버트가 벨로린을 리포밍시켰다고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데, 이걸 실제로 믿는 사람은 골룸이다. 벨로린은 알버트가 리포밍시킨 것이 아니라, ‘알버트와 데스필드’가 리포밍시킨 것이다. 필자는 리포밍이 어떤 조건 하에 이루어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사실 짐작은 어느 정도 가긴 하나, 확신이 없기에 여기에 적진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알버트에 의해 리포밍한 그 순간의 벨로린은 아직 (마치 알버트처럼) 불완전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알버트처럼 스스로 움직이거나 말하지 않고 그 천성대로 노래만을 불렀을 따름이다, 즉 그녀는 아직 자기 속에 ‘나의 영역’을 가지지 않은(그래서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러나 ‘복수’ 알버트의 또 다른 극단인 ‘자유’ 데스필드를 만나는 순간(즉 벨로린이 ‘타인의 영역’인 알버트 그리고 ‘나의 영역’인 데스필드와 한꺼번에 접촉한 순간), 벨로린은 완전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마스터의 생존방식이 인간의 존재방식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이마스터가 선택할 수 있는 두 선택방식은 곧 하나의 인간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존재방식이다. 그래서 하이마스터는 언제나 두 가지 선택지를 지니며, 동시에 두 가지 모두가 같은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벨로린이 킬리와 휘리를 두고 ‘너’와 ‘또 다른 너’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라)
이제부터 언급할 두 쌍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 알버트의 정체성에 대해선 키 드레이번을 분석함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지만, 앞으로 언급될 두 쌍에 대해 잘 살펴보아야 그 분석이 정확하고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파킨슨 신부와 돌탄을 알아보도록 하자. 사실 이 둘 만큼 작품에서 극적으로 대비되는 인물 대립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선 파킨슨 신부의 막대한 출연량과 주제적 측면의 중요도에 비해 돌탄은 (복수 진영의 대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주제의 전개가 이루어지는 장면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탄에 대한 서술은 다른 6명의 선장보다 훨씬 노골적이며, 그래서 작품 내에 나타나는 그에 대한 짧은 서술만으로도 복수 진영의 일곱 선장이 ‘왜 하필이면 복수의 관념을 대표할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잊혀진 탑에서 하이마스터 비니힐은 파킨슨 신부와 돌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당신이 쫓는 별이 뭔지 알 것 같군요. 당신은 스스로 당신을 만들고자 하는 자. 그렇다면 당신의 반대는 세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아의 소유자로군요.” “그 당신이 누군데?” “있습니다. 무리 속에서 더 두드러지는 자. 보입니다. 한 무리에 속해있고 그곳을 벗어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자. 그곳에서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 하지만 그 속에서 유난히 튀는 말투. 예. 보입니다. 이제 답은 만들어졌습니다.”
돌탄은 ‘세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아의 소유자’이고, ‘한 무리에 속해있고 그곳을 벗어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만’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다. 돌탄의 자기정체성은 ‘개인’을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가 속한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필자가 복수를 ‘조화’, ‘타인을 내 속으로 받아들임’, 내 안에 존재하는 ‘타인의 영역’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던 것이 기억나는가? 바로 돌탄이,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선장들이 ‘복수의 대표자’인 이유는, 그들이 키 드레이번처럼 뭔가를 받으면 반드시 돌려주는 존재여서가 아니다(사실 키 드레이번에 대한 이 정의 역시 너무나 막연하다. 뒤에 키 드레이번에 대한 분석에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정의할 때 반드시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전제하기 때문에 그들은 복수의 대표자들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려는 성향을 가리킨다. 그 반대인 ‘수동성’은 한 사람이 그를 둘러싼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것을 고려하며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노스윈드 선단이 ‘마치 공화정 같은’ 것도, 폴라리스 최고 권력집단이 하필 ‘평의회’인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노스윈드 선단과 폴라리스 평의회는 그 중 한 일원의 의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공동체’의 만족을 위해 움직인다. 반면 ‘자유’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타인의 영향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한 ‘개인’이거나, 계급적 체계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수장’이다. ‘자유’와 ‘복수’라는 개념의 대립을 위해 이 정교한 설정을 도입한 타자에게 경배를. 이제 돌탄에 대해 알아봤으니 파킨슨에 눈을 돌려보자. 필자는 개인적으로 파킨슨이 ‘폴라리스 랩소디’라는 작품을 통틀어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가 앞서 ‘타자가 인물에 그들의 개성을 뛰어넘는 관념을 부여하고, 그것에서 인물이 벗어나지 못하게 제어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바로 그 관념이 ‘자유’ 혹은 ‘복수’란 관념이다. ‘자유’ 측의 7인은 이미 ‘자유’라는 관념을 부여받았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행동에 있어 언제나 ‘자유’를 추구한다(스스로 변화하려하고, 타인의 영향력을 간과하고, 내 안에 ‘타자의 영역’을 무시하는 등의 행위). 그리고 ‘복수’의 7인 역시 ‘복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 14인 중에서 파킨슨만은 스스로 ‘자유’라는 관념에서 벗어난다. 그의 행보를 살펴보라. 그는 교회가 그어놓은 지형적 경계를 뛰어 넘어 테리얼레이드의 교구로 자원해 갔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인 교회의 명령을 어기고 율리아나를 구했으며, 법황과 라오코네스의 권고를 무시하고(물론 라오코네스는 파킨슨의 이러한 ‘자유로운’ 행동방식을 계산에 넣고 일부러 그러한 권고를 한 것이긴 하다) 펠라론 게이트로 뛰어든다. 그의 이 모든 행동은 인효적 효력을 긍정하려는, 다시 말해 ‘단순히 주님이 만들어놓으신 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들어낸 선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 분을 영광되게 해 드’리고자 하는, 그럼으로써 ‘주님이 만들어주신 성전이나 교회보다 더 많이 사랑’하려 하는 자신의 신앙을 확인받고, 만들어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심지어 ‘바깥의 교회’를 무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펠라론 게이트를 거치고, 잊혀진 탑을 빠져나온 파킨슨은 율리아나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다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파킨슨 신부는 이 간단한 문장에 엄청난 질문을 담아낸 율리아나의 화법에 먼저 감명 받았다. 신부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는 그 손에 눈길을 떨어트렸다.
“저는 그러고자 합니다.”
“에름 후작님도, 신부님도… 사랑해봐야 보답이 오지 않는 상대를 다만 사랑하겠다시는군요. 발은 그 사랑이 자기 것이니 무슨 문제냐고 했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데스필드는… 예. 패스파인더에게 목적은 없지요. 다만 걸어갈 뿐.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다만 걸어갈 수 있을까요?”
“다만 살아가기는 하잖습니까?”
율리아나는 놀란 눈으로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신부는 우수 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보다 더 멀리 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테리얼레이드에 닻을 내리기로 결정했지요.”
“더 멀리…?”
“예. 공주님.”
문득 율리아나는 파킨슨 신부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감을 보았다. 그것은 패배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초췌함이나 비굴함으로 얼룩진 패배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싸움을 중단한 자의 눈빛이었고 몸짓이었다. 그리고 정지된 춤이었다.
“저는 이 정도까지 다다른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율리아나는 문득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파킨슨 신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돌이켜보았다. 결코 많이 안다고는 하기 어렵다. 몇 개월 전에 만났고 잠시 동행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헤어져 있다가 최근에야 좀 이상한 방식으로 다시 만났다. 친구라는 이름은 아직 무겁고 지인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이 신부를 보며 율리아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래서 그 이름을 규정지을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율리아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말했다.
“별을 보는 눈을 가졌으면서도 나뭇가지 끝에도 닿지 않는 팔을 가졌다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요?”
파킨슨 신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은 보이지 않습니까.”
‘폴라리스 랩소디’ 전체 스토리에서 가장 파격적인 이 장면은 그래서 가장 감동적이다. 신앙에 있어서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수없이 번민하고, 한없이 자기반성하고, 끝없이 스스로를 시련의 늪으로 밀어 넣었던 파킨슨은 자신을 옮아 매던 변화와 도전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자유’롭기를 포기하고 사랑으로 ‘복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패배자이면서도 패배자가 아니다. 파킨슨의 패배는 마치 라스꼴리니꼬프의 패배와 같다. 끝없이 오만하던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의 발아래 무릎 꿇고 죄수들과 융화했듯이, 파킨슨도 홀로 신앙을 찾길 그만두고 테리얼레이드의 주민들과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파킨슨 신부가 가장 입체적이고, 가장 파격적이며, 가장 감동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감상적이 된 기분을 벗어나 마지막 한 쌍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들은 바로 하이마스터 에레로아의 선택지인 두 사람, 퓨아리스 4세와 하리야 헌처크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부여된 관념이 뒤바뀐 것이 아닌지 궁금해할 것이다. 왜 신앙과 현실을 분리시켜 일견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하리야가 복수의 대표자인가? 왜 파킨슨을 설득하기 위해 교회가 가져야하는 항상성을, 즉 사효적 효력을 옹호하는, 그리고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의도를 가져 플로라에게 ‘보수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퓨아리스 4세가 ‘자유’를 대표하는가? 그런데 유념해두어야 할 것은, 하리야와 퓨아리스 4세의 행동들이 사실은 신앙에 전혀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하리야는 언제나 신앙과 현실을 완전히 구분 짓고, 그래서 가장 신앙모독적인 행동조차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었다. 하리야의 모든 행동은 그의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전혀 관계가 없이 이루어지는 그의 정치적 감각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이것은 퓨아리스 4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정치세력들 속에서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곡예사를 흉내’내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인형극 예술가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그는 벌어지고 있는 전황을 자기 의도대로 이끌어가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퓨아리스 4세 역시 (적어도 작품 내에서는)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정치가이다. 파킨슨과의 대담에서도 그의 정치적 감각이 드러난다. 파킨슨의 질문은 그가 평가한대로 ‘교회의 체제가 위기를 맞는 지점’에 대한 것이었고, 퓨아리스 4세는 그 때문에 파킨슨이 틀리다는 신앙적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태를 고백’한다. 그는 교회 세력의 ‘수장’으로서 그 세력을 유지해야만 하는 ‘정치적 근거’로 파킨슨과 맞선 것이다. 그래서 파킨슨은 법황청을 나오며 데스필드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냐. 주님께 맹세코 그 분께서는 성의를 다하셨다. 확신할 수 있어. 그 분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이 부하 성직자를 전혀 꾸중하시지 않으셨고 내 의문과 갈등에 모든 열의를 다해 참여해주셨다. 난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독실한 신앙심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이적이 함께 한 것도 아닌 로데인 백작이 어떻게 교회의 정상에 서게 되었는지 의아하게 여기곤 했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왕이 될 만한 분이다.” 이 말에 약간의 어폐가 느껴지지 않는가? 파킨슨은 퓨아리스 4세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신앙심’에 의문을 품고 있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를 만나고 나서는 그의 ‘정치적 능력’ 때문에 그를 인정한다. 왜 하필 ‘성자가 될 만 한 분’이 아니고 ‘왕이 될 만 한 분’인가? 파킨슨은 자신과의 대화에서 신앙적 입장을 보여주기 보다는 정치적 견해를 드러낸 퓨아리스 4세의 입장을 이해했고, 그래서 그를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끌어갈 ‘최고 권력자’로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파킨슨은 퓨아리스 4세의 권고를 깡그리 무시할 수 있었다. 퓨아리스 4세의 권고는, 파킨슨의 ‘안의 교회’의 근거를 직접 무너뜨리는 핸솔 추기경의 신앙비판과는 달리 ‘바깥 교회’로부터의 권고였고, 그래서 파킨슨은 그것을 무시한 것이다. 자, 서술이 길어졌는데,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퓨아리스 4세의 행동은 (그것이 페인 제국의 ‘부활’이든 악마 트로포스의 추방이든)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의 인물이다. 하리야의 경우는 다르다. 그의 정치적 목적은 비교적 명확한데, 그것은 바로 노스윈드 선단 혹은 폴라리스라는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밌는 사실이 나타난다. ‘존속’은 바로 ‘복수’의 행동양식이다. 공동체의 생존, 유지, 안정화는 그에 속한 일원들이 다른 일원들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들 중 하나라도 독단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 공동체는 균형이 깨지고 부조화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여러 번 말하지만) 하리야가 시작한 국가의 통치체제는 공화정이다. 그런데 ‘발전’은 어떤가? 발전은 움직이고 나아가고 변화하려는 의지, 즉 ‘자유’의 의지이다. 그러면 ‘복수’의 인물인 하리야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필자가 행한 분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지점 역시 타자(打者)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만약 일곱 선장이 모두 복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필자의 분석대로라면) 그들은 한없이 정체되어 있었어야 마땅하다. 그렇다, ‘자유’는 곧 변화·발전이자 독단이지만, ‘복수’는 조화·안정이자 정체(停滯)인 것이다. 이 정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은가? 바로 ‘드래곤 라자’의 엘프에 대해 설명하며 이루릴이 말하는 개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은 곧 그들 모두가 하나의 상태를 답보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노스윈드 선단은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바로 키 드레이번의 존재 때문이다.
그러면 키 드레이번은 과연 어떤 자인가? 작품에서 매우 노골적인 암시를 통해 드러나는 키 드레이번의 정체는 바로 ‘왕’이다. 생각해보라. 바스톨은 오왕자의 검의 후보로서 키 드레이번을 선택한다. 하리야를 비롯한 선장들은 키 드레이번을 신생국의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 하리야 스스로는 에레로아와의 선술집에서의 대화에서 키 드레이번이 자신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 때도 키 드레이번은 사실상 하리야(를 포함한 노스윈드 선단)의 왕이다. 바스톨은 또 다시 그의 부관인 가일즈와 대화할 때 키 드레이번을 ‘긴 선’, 다른 말로 왕이라고 지칭한다. 하리야는 잊혀진 탑에서 돌아온 키 드레이번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말한다. ‘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아마 타자의 좀비들은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잘 단련되었기 때문에 왕이 어떤 존재인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왕이란 바로 ‘대속자’이다. 왕은 한 공동체가 가지는 모든 것, 즉 희망·염원·욕망·추구·책임·죄악 등을 한꺼번에 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 ‘왕’이란 존재는 타자의 작품에서 자주 변주되는데, ‘드래곤 라자’의 라자, ‘폴라리스 랩소디’의 대속자·거울·새장의 주인, ‘눈물을 마시는 새’의 낙엽·왕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하나 생각해보기로 하자. 라자는 그 자신의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라자는 드래곤과 인간을 ‘하나의 소통가능한 공동체로 엮어주는 매개’이며, 동시에 드래곤 자신이기도 하다. 인간은 드래곤과 라자에게 그들의 희망·염원·욕망·추구·책임·죄악을 투사하고, 드래곤과 라자는 그들이 투사한 것을 들어준다(복수한다, 눈물을 마신다, 어떤 표현을 사용해도 좋다). 군인은 자신의 무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일원들 즉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맡긴 죄(사람을 죽이는 죄)를 대신 수행해주는 이들이다. 그리고 거울은 다른 사람들을 ‘비춰주는’ 존재이다. 새장의 주인은 새에게 필요한 일들(새장을 만들고, 음식과 물을 주고, 깃털과 발톱을 정리하고, 관심을 주는 등)을 새 대신 해줘야하는 자이다. 낙엽은 나무의 다른 부분들(뿌리, 줄기 등)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은? 왕은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그 공동체가 그에게 투영하는 모든 것을 짊어지는 존재’이다. 왕은 공동체가 가지는 정복·복지·책임·희생의 욕구를 대신 수행해주는 존재이다. 휴리첼을 보라. 그는 라자가 됨으로써 캇셀프라임과 하나가 되었고, 그들은 이제 인간들의 ‘왕’이 된 것이다. 드래곤·라자와 인간의 공동체는 계약과 그 계약의 증표인 라자에 의해 유지되며, 그것이 유지되는 한 드래곤과 라자는 인간들이 투사하는 소원들을 들어주어야 한다. 키 드레이번을 보라. ‘노스윈드 선단’이라는 공동체는 키 드레이번에게 자신들을 투사하고, 키 드레이번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 다림에 국가를 만들자고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이 누구인가? 그들의 왕인 키 드레이번이다. 왜 노스윈드 해적들은 절호의 기회인 상황에서도 (서 하빈저가 지적했듯이) 키 드레이번을 기다리는가? 그들의 왕인 키 드레이번이 그들을 ‘대신 이끌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머뭇거리는 것이다.(그런데 사실상 그 시점에서 키 드레이번은 자신을 ‘폴라리스의 왕’이 되길 거부한다, 즉 폴라리스라는 공동체를 유지시키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대신 그것을 ‘반사’한다. 이런 초딩같으니, 쯧쯔)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키 드레이번과 알버트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알버트는 물수리호의 키 드레이번, 다시 말해 물수리호의 왕이다. 물수리호는 선원들의 ‘자유’가 철저히 배제된, ‘복수’의 공간이다. 그리고 정체될 수 있는 그들을 ‘대신 이끌어주는’ 사람이 바로 그들의 왕인 알버트인 것이다. 결국 키 드레이번(과 알버트)은 가장 능동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수동적인, 자기정체성과 자기의지가 부재하는 사람이다.
키 드레이번이 ‘복수’의 화신이라면, 오스발은 ‘자유’의 화신이다. 그들은 가장 극단적인 반대항이다. 그는 정의되지 않는 자이다, 왜냐하면 타인이 만들어주는 ‘정의’라는 틀에 그가 속박되지 않기 때문이다. 키 드레이번이 유피넬이라면, 오스발은 헬카네스이다. 독단적이고 불안정하지만, 움직이고 변화한다. 물론 그 움직임과 변화엔 규칙이 없다, 다시 말해 타인에 의한 정의가 불가능하다, 즉 타인과 아무런 연결점이 없다. (칸트적인 용어를 사용해 설명하자면) 키 드레이번이 연역판단과 같은 존재라면, 오스발은 종합판단과 같은 존재이다. 오스발이 인간과 악마를 자신의 ‘악의 새장’에 넣고 보살핀다는 말은, 그들을 ‘자유의 새장’에 가둔다는 말과 같다. 즉, 인간과 악마가 이루고 있는 공동체를 분해하고, 그들 모두가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하며, 세상을 자유가 선사하는 혼돈에 빠뜨린다는 것이다(역시 오슈ㅣ발). 그런데 그러한 ‘완전한 자유’의 화신인 오스발도 단 하나의 제약이 걸려 있다. 바로 율리아나 공주이다.
율리아나는 ‘반왕’이라는 관념이 부여된 존재이다. 오스발은 ‘반대인 것은 적이 아니라, 그냥 반대인 것’이라며 반왕의 개념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여지껏 살펴봤듯이 ‘자유’와 ‘복수’라는 대립적 개념은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른, 그러한 적대적인 대립항이 아니다. 자유가 이기면 인간은 독단과 혼돈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유사할지도). 그렇다고 복수가 이기면 인간은 끝없는 정체에 빠지게 될 것이다(마치 ‘퓨처 워커’에서 시간이 정지된 상태처럼). 그래서 인간이 가진 이 두 존재양식엔 선악의 잣대가 개입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양자 중 하나만을 택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론적 상태를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율리아나이다. 그녀는 ‘복수’의 새장에 갇혀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유’를 희구하는 존재이며 ‘닿을 수 없는 별을 잡고자 하는’ 존재이다. 필자는 그녀가 이영도가 제시하는 일종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유와 친해질 수도, 복수를 증오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녀는 최악의 경우 정체되어 있으면서도 독단적일 수 있는 존재이며, 최선의 경우 발전하면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녀는 연역판단과 종합판단을 융합해 ‘선천적 종합판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어느 쪽이든 그녀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바로 그녀가 ‘파격적’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유일하게 인간의 서로 융합할 수 없는 두 본질(자유와 복수)을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실제로 작품 내에서도 그녀는 자유인 오스발과 복수인 키 드레이번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자, 이제 ‘폴라리스 랩소디’가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간략하게 요약하기 위해 앞에서 사용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도록 하겠다(필자도 새로운 문장으로 다시 쓰기 힘들다). ‘폴라리스 랩소디’는 ①인간이 가진 ‘자유’와 ‘복수’라는 두 본질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고, ②이 대립적인 존재방식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개인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다른 모두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를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며, ③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시도해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①은 이제 모두 아리라 생각한다. 즉 인간이 ‘자유’와 ‘복수’라는 대립적 개념을 상보적으로(complementarily)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②‘자유’는 변화하려는 인간의 의지이지만 ‘독단’으로 빠질 수 있고, ‘복수’는 조화를 이루려는 인간의 의지이지만 ‘정체’에 빠질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③율리아나 공주를 통해 타자는 인간이 두 이율배반적인 본질을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율리아나와 같은 인물이 가능한지도 의문이고, 율리아나에 의해 두 본질이 합쳐져서 나타난 양태가 어떤지도 역시 타자조차 알 수 없다(그야말로 판타지). 따라서 타자는 이 결말을 무책임해 보이는 오픈엔딩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타자를 무책임하다고 욕할 순 없다. 어쨌든 작가의 의무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며, 더 쓰고 싶어도 그 부분은 타자의 지평을 넘어선 부분이기에.
마지막으로 ‘폴라리스 랩소디’의 결말에 대해 필자의 의견과 의문점을 덧붙여보고자 한다. 오스발은 율리아나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벨로린이 ‘승리자’라고 말한다. 동정심을 가진 하이마스터이고, 인간을 동정하는 벨로린은 오스발이 선사하는 자유의 구렁텅이에 빠져 독단과 혼돈의 시련을 겪을 인간을 끝없이 동정하고, 복수를 선택한 자신을 끝없이 저주할 것이다. 아마도 오스발이 그녀에게 줄 ‘자유의 복수’는 무관심일 것이다. 동정은 타인에게 관심을 던지고,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 그것의 반대항은 무관심일 것이며, 인간의 세계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왜 승리자일까? 필자는 첫 번째 빛의 종족인 엘프가 몰락한 이유가 바로 증오와 배례의 주인 χαχοζ δαιμων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χαχοζ δαιμων이 지배하는 세계는 ‘자유’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엘프는 아마 (‘드래곤 라자’에서 예상되었던 것처럼) ‘정체되었기 때문에’ 몰락하지 않았을까? 오스발이 주는 자유는 시련의 선물이 아닐까? 인간이 자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깨닫도록 오스발이 준 시험이 아닐까? 여기에서 필자는 ‘폴라리스 랩소디’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필자가 언급한 바흐찐이나, 타자가 ‘눈물을 마시는 새’의 잡담에서 지적한 르네 지라르나 모두 도스또예프스끼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철학자들이다)
그리고 ‘폴라리스 랩소디’의 결말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트릭이 하나 숨어있다. 자, 생각해보자. ①자유호가 폴라리스를 떠난 때는 폴라리스가 다벨-필마온 연합군을 무너뜨린 바로 그 날이다. (동시에 오스발이 증오와 배례의 주인 χαχοζ δαιμων이 된 시점이기도 하다) ②오스발이 율리아나를 떠난 때는 자유호가 그들이 탄 스톰라이더호의 근처에(반나절 거리에) 닿은 때이다. ③갑자기 시점이 변경되어 ‘폴라리스 랩소디’에 등장한 다른 인물들에 대한 에필로그가 시작된다. 파킨슨, 데스필드는 테리얼레이드에 도착했다. 서 소사라는 제국용병대장에 취임했으며 심지어 그 계약을 모두 수행하기까지 했다. 이루미나는 만삭의 상태이다. 바스톨은 개선장군으로서 사트로니아로 복귀했고, 다시 폴라리스로의 출진을 부탁받는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다시 폴라리스로 향하며, 필마온 기사단 역시 (아마도 법황의 명령을 받고. 혹은 자의로 출병했을 수도 있다) 폴라리스에 도착한다. 다벨의 군대 역시 폴라리스로 진군하고, 전쟁은 폴라리스의 패배로 끝난다. 폴라리스가 건국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④그리고 오스발과 키 드레이번은 서로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스토리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자유호가 오스발을 따라잡는데 걸린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그것은 ⓐ서 소사라가 제국용병대장에 취임해 혼 족을 격파하고 그 보수인 레모산 작렬포를 다벨에 보낸 후, 그것을 장비한 다벨 군대가 폴라리스를 정복하는데 걸린 시간과 같고, ⓑ바스톨이 폴라리스에서 사트로니아로 귀환한 후 군대를 다시 갖춰 폴라리스에 당도하는데 걸린 시간과 같으며, ⓒ필마온 기사단이 페리나스 해협으로 물러난 뒤 다벨, 사트로니아, 법황 중 어느 한 세력과 진군날짜를 협의한 후에 폴라리스에 도착한 시간과 같다. 그렇다면 오스발은 그 오랜 시간동안 3L의 배 중 하나인 자유호를 노 젓는 속도만으로 뿌리쳐왔다는 소리인가? 그것 참 오슈ㅣ발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오스발과 키 드레이번은 위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만났다고 판단해야 옳다. 그렇다면 두 태양 중 떨어진 것은 무엇인가? 아니면 정말로 오스발과 키 드레이번은 긴 시간동안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펼쳐온 것인가? 이것은 알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오스발과 키 드레이번의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 추론해볼 수 있게 만드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에필로그에 나타난 사건들(폴라리스의 몰락 등)은 인간이 자유로워진 결과인가, 복수하게된 결과인가, 아니면 아직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상태에서의 결과인가? 재미있는 생각거리가 될 것이다.
필자의 이 분석은 A4 용지로 12쪽을 약간 넘는다. 아마 읽는데 굉장히 힘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필자도 이거 쓰는데 5시간 넘게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고 같은 건 할 생각도 안했다. 그래서 겹치는 부분도 있겠고, 구멍이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반론이 있다면 친절히 다시 논의해 볼 생각이 있다. 그것을 통해 글이 수정되어 좀 더 견고해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반론을 하고자 하면 우선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해줬으면 싶다. ‘폴라리스 랩소디’가 필자에게 가장 재밌었기 때문에 이것을 분석한 것인데, 마음이 내키면 ‘눈물을 마시는 새’나 ‘드래곤 라자’도 이렇게 한 번 써 보고 싶다. 그러나 아마 안 쓸 것이다. 비슷한 내용이 반복될 것 같으니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에선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정말 판타지적으로 전개된다. 그 현란함이 필자를 글쓰기로 유혹한다면, 그 때 이들 작품에 대해 글을 써보도록 하겠다. 그럼, 필자의 글을 이만 마치겠다.
# by | 2012/04/05 00:35 | book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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