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다시 읽기

이 글은 원래 단편적인 분석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으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금은 수고스럽더라도 중심을 잡는 것이 가독성의 측면에서 낫다고 판단했다. 한 달이 넘는 긴 기간을 들여 글을 마친 지금 시점에 보면, 원래 의도했던 가독성은 거의 내다 버린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너무 띄엄띄엄 글을 썼더니 필자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산만해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퇴고 작업은 따로 하지 않으려 한다. 중언부언하더라도 너그럽게 양해를 바란다.

1. 개밥바라기 – 사물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개밥바라기는 도깨비 무사장의 무기이자, 바우 머리돌 성주의 화훼재배 중 유일한 성공작이고, 치천제의 자매인 용이기도 하다. 개밥바라기라는 이름은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영웅왕의 검 바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타자가 무사장의 검명을 이렇게 지은 것은 분명 전작에 대한 오마주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또 다른 오마주가 담겨있기도 하리라.

개밥바라기의 ‘바라기’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이 별이 뜰 때 즈음이 개밥그릇에 저녁을 채워 넣어야 할 시간이었다는 데에서 이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작품 내에서도 ‘밤을 부르는 별의 이름을 따’ 그리 불린다고 표현된다. 이 별의 또 다른 이름은 샛별로, ‘새’는 동녘을 의미하므로 동쪽에서 뜨는 별이라는 의미에서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 별은 금성이다. 금성은 저녁 즈음의 서쪽 하늘에 보일 때엔 개밥바라기로, 새벽녘 동쪽 하늘에 보일 때엔 샛별로 불린다. 같은 대상을 가짐에도 뜻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학자이자 분석철학의 정초자인 고틀로프 프레게는 바로 이 예시로 언어는 그 대상인 지시체와 표현방법인 뜻이라는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프레게와 이 작품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길래? 사실 샛별과 개밥바라기의 예시는 워낙 훌륭한 고찰이기 때문에, 분석철학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도 이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다. 그 중에는 (필자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이름이 익숙할) 들뢰즈도 있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에 있어 중심개념 중 하나인 ‘존재의 일의성(一義性)’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예가 (스피노자의 야곱/이스라엘과 더불어) 바로 프레게의 샛별/개밥바라기의 예시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일의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샛별과 개밥바라기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어느 지점에서부터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갈라지기 시작하는가?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원래’ 다른 것인가? 하지만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동일한 대상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그 자체로 다르다고 말하려면, 그 차이는 금성이라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에서부터 유래해야 할 것이다. 즉, 금성의 바깥에 샛별의 샛별다움이 ‘있고’, 개밥바라기의 개밥바라기다움이 ‘있으며’, 금성은 새벽과 저녁에 각각 샛별과 개밥바라기의 ‘다움’을 나누어받아야(分有) 할 것이다. 금성의 외부에 ‘있는’ 샛별/개밥바라기는, 현실의 바깥으로부터 때에 맞춰 실존하는 금성에 자신의 ‘다움’을 부여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새벽과 저녁이라는 한정된 시간에만 나타나는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에 비해 항상적(恒常的)이다. 반대로 금성의 몸을 빌어 새벽과 저녁에 잠시 나타나는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는, 그들에게 ‘다움’을 나누어주는 현실 너머의 샛별/개밥바라기보다 일시적이다. 그러나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와 현실 너머의 샛별/개밥바라기는 공히 ‘있다.’ 바로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한다. ‘있다’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두 차원의 샛별/개밥바라기에게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단어의 뜻이 서로 다르게 사용됨을 알게 된다. 현실 너머에서 자신의 ‘다움’을 나누어주는 샛별/개밥바라기는 항상적이고, 그래서 현실의 그것에 비해 더 ‘탁월하게’ 있다. 반면 그 ‘다움’을 나누어받는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는 일시적이고 간헐적으로 있기 때문에, 현실 너머의 그것에 비해 더 ‘열등하게’ 있다. 이렇게 ‘있음’이 어떤 경우에는 ‘탁월하게’라는 뜻을 함축하고 다른 경우에는 ‘열등하게’라는 뜻을 함축할 때, 우리는 이 ‘있음’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가 다의적(多義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이 있는가? 우리는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 사이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다. 우선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가리키는 방법(mode)의 다름으로부터 차이가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있다고 말할 때, 이 때의 ‘있음’은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샛별이 있든, 개밥바라기가 있든, 어쨌든 그것은 동일한 의미에서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새벽녘 동쪽 하늘에 떴을 때엔 샛별의 방식으로, 저녘 즈음 서쪽 하늘에 떴을 땐 개밥바라기의 방식으로 있을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샛별과 개밥바라기를 구별할 때, 우리는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 외의 다른 것을 상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따라서 ‘있다’라는 말에는 다른 함축된 의미가 없고, 단지 ‘있다’라는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가 일의적(一義的)”이라고 말한다.

개밥바라기는 도깨비 무사장의 무기이자, 바우 성주의 화훼재배 중 유일한 성공작이고, 치천제의 자매인 용이기도 하다. 「피를 마시는 새」를 유심히 본 독자들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여러 이름을 나열하는, 이러한 병렬적 표현방법을 작품에서 종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엘시 에더리, 신의 아들, 하지만 신에게 죄를 저지른 자가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피를 마시는 새」, 41장. 이후 「피를 마시는 새」를 인용할 경우 장만 표시하도록 하겠다)”나 “아라짓 제국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화이며 발케네의 통치자, 자유무역당의 후원자, 용감한 도둑들의 친구, 그리고 뿔관의 주인(16장)”과 같은 곳에서 말이다. 샛별, 개밥바라기의 예시가 가리키는 바를 고려하면, 이러한 표현법에 특정한 의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이 너무 빠르게 진행된 것은 아닐까? 겨우 개밥바라기라는 단어 하나에 과민반응하여 성급하게 텍스트 바깥의 개념을 끌어온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필자는 이 두 개념, 즉 존재의 다의성과 일의성의 부딪침이야말로 이 작품을 이해함에 있어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러기에 이 글에선 이 개념들이 드러나는 곳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먼저 핵심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결론을 반복하여 서술하게 만드는 수고를 덜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어지는 내용

by 데오늬달비 | 2019/09/12 08:56 | books | 트랙백 | 덧글(0)

'폴라리스 랩소디' 다시 읽기

0.

 

필자는 이전에 바흐찐을 통해 폴라리스 랩소디를 읽은 적이 있다. 이 분석이 폴라리스 랩소디에 대한 주류 해석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이 작품을 깊게 알고자 관련 리뷰를 인터넷으로 뒤져본 독자라면 우연히 접할 수도 있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타자는 이 작품 이후로 주제적인 측면에서의 니체적 성향을 매우 강하게 드러내며, 눈물을 마시는 새피를 마시는 새는 니체의 잠언들을 조금 각색하여 옮겨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니체를 오마주하고 있다. 타자의 소설들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도 이 두 작품의 주제가 니체와 밀접히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필자는 비록 많이 늦긴 했지만, 그리고 니체에 대해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니체를 통해,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니체에게 강한 영향을 준 스피노자와 니체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들뢰즈를 통해 폴라리스 랩소디를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그러고자 하는 이유를 변명삼아 늘어놓자면, 이전 글이 폴라리스 랩소디의 주제적 대립관계들(즉 자유-복수와 그 변주들)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의 소위 계보학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타자에 대한 필자의 시각이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바,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한 사항과 비슷한 서술이 반복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필자가 아는 한 폴라리스 랩소디의 어떤 면이 니체, 스피노자, 그리고 들뢰즈와 맞닿아 있는가를 꼼꼼히 짚어내는 글은 없었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미약하게라도 작품에 대한(혹은 니체, 스피노자, 들뢰즈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필자는 소소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

 

왜 하필 그 철학자들인가사실 폴라리스 랩소디는 니체의 영향을 굉장히 많은 소설이다어떤 면에서 그런가 하면작품의 구성 자체에 니체적인 발상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이다수많은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이 일어나지만그 중에서도 폴라리스 랩소디의 중심축은 (키 드레이번오스발율리아나를 제외하면일곱 하이마스터와 그들과 관계된 일곱 쌍의 중심인물이다키 드레이번오스발율리아나를 왜 제외하는지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나머지 일곱 세쌍둥이 등장인물들을 구도화해보자면대략 한 선의 양 끝에 두 선택지가 되는 두 인물이 있고 그 사이에서 둘 중 한 방향을 선택하는 한 명의 하이마스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하이마스터가 자신의 선택지를 칭하는 말을 살펴보면노래의 불꽃을 지피는 자/불꽃으로 노래를 태우는 자(벨로린), 낮의 끝에 매달린 자/밤을 이끄는 자(라오코네스), 스스로 자신을 만드는 자/세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비니힐), 못박혀 움직일 수 없는 자/움직임 위에 못박힌 자(기릭스), 공포에 사로잡힌 자/공포를 모르는 자(직스라드), 지렛대/지지점(아델토), 바람/나무(에레로아등이다작품 내에서 전자의 인물군은 복수에후자는 자유에 해당하는 선택지라고 알려진다폴라리스 랩소디는 우리에게 자유와 복수의 개념이 무엇인지 직간접적으로 제시한다자유는 어떠한 행위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복수는 마치 거울처럼 어떠한 행위이든 간에 그것에 따르는 반작용로 말이다그러나 이 설명은 필자의 시각에서 봤을 땐 일종의 트릭으로 여겨진다.

 

입버릇처럼 그분을 증오한다고 말하는 이 많아도 그것은 모두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닙니다입버릇처럼 자유를 원한다고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이들도 사실은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그 자들 중 자유를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유를 원하는 이가 없다고요?”

자유는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는 것입니다하지만 사람이 무간섭을 견딜 수 있을까요아무도 사람을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미쳐버릴 겁니다자유를 원한다고 말할 때그는 간섭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간섭만큼 자신도 남을 간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자신의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유를 뺏겠다는 것입니다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그들은 복수의 권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작품의 막바지에 오스발의 위의 말을 통해 자유와 복수의 의미가 급작스럽게 전용된다그러나 이미 위에서 언급한 하이마스터의 선택지를 나타내는 칭호에서 우리는 이미 자유/복수라는 단어가 오히려 능동/수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바로 이 지점이 필자가 이전에 바흐찐을 통해 설명한 대립구도이다). 오스발의 인용된 언급은 그것을 확인시켜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변주되는 자유-복수의 대립항은 바로 이 능동-수동의 대립항으로 대치할 수 있다나인가타인인가?(본인-당신내 중심인가타인 중심인가?(에고이즘-앨트루이즘독단적 결정인가합의적 결정인가?(왕정-공화정내적 신앙인가외적 형식인가?(인효적 효력-사효적 효력)

 

그런데 우리가 자유-복수의 대립을 능동-수동의 대립으로 대치할 경우 발생하는 괴리가 있다폴라리스 랩소디에서의 자유와 복수는 우리에게 서로 접점을 가질 수 없는 모순적인 관계로 파악된다절대적인 독립성과 무차별적인 인과 사이에는 접점이 없어 보인다(이에 대해서는 후에 키 드레이번과 오스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그러나 능동과 수동은 모순적인 관계가 아니다이는 라이온과 하리야의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낙수가 바위를 뚫는 것인가아니면 바위가 낙수를 받아들이는 것인가하나의 현상은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에게 효과를 일으키지만그 효과가 어떤 고정된 방향성을 가지진 않는다살인이라는 현상을 맞이한 성직자에게 순교는 자살인가타살인가키 드레이번에게 다가가는 오스발은 에름 후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인가이루미나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인가능동과 수동이 상호모순적이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현상을 주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결과(consequence)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상이 이렇게 다양하게 인식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니체에 있어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신체는 우연의 산물이다신체는 충동들 전체가 만나는 장소일 뿐이며그 충동들은 한 인간의 삶을 위해 개인화되었으므로 오로지 탈개인화되기만을 갈망한다이러한 충동들의 우연한 결합으로부터 탁월하게 사람을 기만하는 원리가 탄생하는데그것이 바로 충동들이 상황에 따라 조합해내는 개인과 함께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두뇌활동이다. (...) 요컨대신체의 일관성은 자아의 일관성이다신체는 이 자아를 생산하고또한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일관성을 생산한다그러나 이 신체 자체는 죽음과 재생에 의해 여러 번 죽고 되살아난다신체의 연령들은 사실상 이 신체를 형성하고변형하고그 다음에는 버리는충동의 운동들일 뿐이다. (니체와 악순환피에르 클로소프스키, 2볼드체는 필자 강조)

 

니체에 있어 자아는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자아를 발생시키는 것은 충동들혹은 힘들이다인용된 클로소프스키의 글에서 독자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신체도 그 자체로 이미 충동힘이라는 것이다흘러가는 급류를 이루는 물 방울방울이 각각 급류를 이루는 흐름 자체이면서도 흐름의 일부인 것처럼신체는 이미 충동이면서도 충동들의 흐름의 일부이다또한 한 방울의 물이 또 다른 방울들의 합인 것처럼 하나의 신체 역시 신체의 부분들의 합이다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이미 피를 마시는 새의 파지트 대선의 설법에서 익히 들은 바 있다즉 충동/힘은 본질적으로 복수적(plural)이다순서상 어떤 자아가 현상을 경험하고 그것을 (능동/수동이든 좋다/나쁘다든 간에어떤 식으로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충동들 혹은 힘들의 결합이 신체에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며그 효과를 평가하는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그래서 본질적으로 복수적인 충동/힘은 자체적으로는 단일한 의미/방향을 가지지 않으며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의미/방향을 잠재적으로 가진다고 말해야 한다자아는 이런 복수적인 충동 혹은 신체에서 탄생된 기만하는 원리이다어떠한 기만인가바로 충동신체자아가 일관성을 가진다는 기만. ‘항상성을 가질 것(퓨아리스 4)’을 주문하는 기만. (니체는 이렇게 본래 복수적인 힘에 대한 일반화하는 자아의 승리를 능동적인 생에 대한 반동의 승리긍정적인 사유에 대한 부정적 사유의 승리라고 비난한다이미 독일의 나찌즘에 의해 오용되어 온 주인에 대한 노예들의 승리라는 개념은 원래 이러한 복수적이고 잠재적인 비주체적 힘에 대한 신화적/주체적 자아의 속박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의식 자체는 충동들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암호화에 다름 아니다암호의 해독은 그 자체로 개인이 획득한 메시지의 전도이다왜냐하면 모든 것은 머리’(직립자세)로 수렴되고메시지의 해독도 이 수직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만일 이 자세가 인간에게 습관적인 것도 고유한 것도 아니라면메시지라고 부를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의미/방향sens은 직립자세로부터 출발하여 상···후라는 기준들에 의해서 형성된다. (니체와 악순환피에르 클로소프스키, 2볼드체는 필자 강조)

 

일곱 하이마스터 두 대립되는 선택항은 따라서 본래 모순적인 관계는 아니며오히려 어떤 현상에 동시에 잠재되어 있는 두 방향/의미에 대한 유비라고 볼 수 있다작품 내에서도 이러한 점을 꾸준히 지적하고 있다벨로린은 알버트와 데스필드 양자를 모두 접하고 나서야 자아를 형성하게 되며이후 자신의 두 선택항인 킬리와 휘리를 와 또 다른 너라고 일컫는다벨로린이 일곱 가지 악덕 중 질투의 하이마스터이면서도 동시에 동정심의 하이마스터이기도 한 이유 역시 바로 이 자아의 이차성(二次性)에 기인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현상의 의미는 그것이 자아에 미치는 효과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주목한 철학자는 바로 스피노자인데그의 저서 에티카」 3부의 후반부 정서의 의미에 나타나는 다음의 부분이 우리를 흥미롭게 할 것이다.

 

23.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며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해명 질투에는 보통 동정이 대립되고 따라서 동정은 말의 의미와 달리 다음처럼 정의될 수 있다.

24. 동정이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또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다.

해명 이 외에 질투에 관해서는 제3부의 정리 24의 주석과 정리 32의 주석을 참고하기 바란다이것들은 외적 사물의 관념을 그 자체에 의한 원인이든 우연에 의한 원인이든 간에 자기들의 원인으로 동반하는 기쁨과 슬픔의 정서이다. (...) (에티카스피노자, 3)

 

동정과 질투라는 정서는 타인의 행복이라는 현상을 마주해 자아가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받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결과이며결국 이 상반되는 듯한 두 정서는 동일한 현상의 두 양상일 뿐이다그리고 이에 비추어 독자는 타자가 어떤 현상을 기준으로 음란을 추억과 대립시키는지(에레로아), 나머지 다섯 악덕인 분노/나태/폭식/자만/탐욕에 어떠한 덕을 대립시키는지 추측해보는 가외의 즐거움도 누려볼 수 있을 것이다어쨌든 지금 우리가 중점적으로 보아야할 사실은 하이마스터-그들의 두 선택항이라는 구도가 단순히 능동-수동의 상반된 양상을 그려내기 위해 설정된 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이 구도는 능동과 수동이 발생하는 지점으로 독자를 유도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이다바로 이 점이 폴라리스 랩소디를 타자의 전작들과 차별화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자아가 본디 복수적이라는 발상은 이미 타자의 처녀작인 드래곤 라자에서도 중심 테마를 이루는데이미 익숙한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통해 이 점이 잘 드러난다하지만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타자는 그 복수성의 원인이 되는 지점으로 독자를 인도한다바로 잠재성의 지평으로.


2.

 

일곱 하이마스터와 그들의 두 선택항은 우리에게 능동-수동이란 무엇인가자아란 무엇인가그리고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위해 마련된 구도이다이를 통해 우리는 자아가그리고 그것이 느끼는 능동-수동의 관념 역시도 잠재성의 영역에서 현실화된 이차적인 결과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그렇다면 자유와 복수의 대립은 모두 능동-수동의 쌍으로 대체되는가그렇진 않다그렇다면 자유-복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우리는 이 주제를 살펴보기 위해 작품 내에서 또 다른 커다란 축을 담당하고 있는 구도를 살펴보아야 한다바로 키 드레이번-오스발의 대립 구도이다.

 

키 드레이번은 작품 내에서 복수의 개념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복수는 (이미 상기했듯이어떤 행위에 대한 반작용더 나아가 인과 혹은 필연성 자체를 의미한다전 제국이 그로 대변되는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모든 사람들이 인과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것이 바로 그가 제국의 공적 1호인 이유이다그런 의미에서 키 드레이번은 개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외적인 장애 혹은 한계 자체처럼 보이기도 한다이러한 키 드레이번의 면모는 율리아나를 통해 더욱 명확히 제시된다.

 

저는 이루미나를 사랑합니다.”

너무 사랑하셔서 몸의 괴로움은 상관없을 정도로?”

또 다시 나오는 대로 말해버리고 만 율리아나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하지만 에름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전 성자가 아닙니다공주님상관없다니요하지만 전 이것을 말하고 싶군요사랑과 고통이 꼭 길항작용을 하는 걸까요?”

?”

사랑이 크면 다른 사소한 것은 견딜 수 있다혹은 사랑 때문에 눈이 먼다정말 그럴까요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제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전 이루미나를 사랑합니다만 그것 때문에 그녀를 한번 안을 수도 없는 고통을 잊지는 않습니다오히려 더 커지더군요하지만 그녀를 안을 수 없다는 고통 때문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그래서 전 그 두 가지 감정을 똑같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지 않기로둘 다 정직한 저의 감정이고 그래서 둘 다 저에겐 소중한 겁니다전 영원히 이루미나를 사랑할 것이고그녀 때문에 겪는 고통 때문에 그 사랑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모르겠군요.”

저도 더 이상은 설명할 수가 없군요제 경험에서 느끼는 것들이라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말할 수가 없어요미안합니다.”

에름은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며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율리아나는 갑자기 소스라치는 기분을 느꼈다.

에름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곤 다시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율리아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에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공주님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오괜찮아요아무렇지도 않아요.”

에름은 그런가 보다 하곤 다시 밤바다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율리아나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를 쳐다보는 에름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부드럽고 선량한 형부율리아나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본 것이리라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잊을 수는 없었다순간적으로 에름 후작의 모습 위로 떠오른 키 드레이번의 모습은 너무 또렷했다. ()

 

아르파데일의 손이 뒤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율리아나는 엉겁결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볼이 화끈해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율리아나는 실눈을 뜨고 큰언니를 바라보았고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리둥절해졌다아르파데일은 들어 올렸던 손을 다른 손으로 꼭 움켜쥔 채 울고 있었다.

… 난 널 동생이라기보다는… 딸처럼 생각해왔어그런데 이 보답이… 고작 이거야?”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없이 아르파데일을 바라보았다아르파데일의 꼭 쥔 두 손은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아르파데일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어머니는… 널 낳은 후 조리를 잘못 하셔서… 돌아가셨어하지만 난난 네가 어머니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하지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어그리고 대대신 어머니가 되어주려고 했너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들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나나름대로는 노력했어그런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확인받는 것은 처음인 말을 들으며 율리아나는 입을 가렸다.

그런데그런데 이제 나는 널 어떻게 봐야 할까어머니로 모자라서 내 아버지까지 빼앗아간 동생주여나는 너를 어떻게 여겨야 할까?”

무슨 소리야언니!”

율리아나는 비명을 외치며 아르파데일에게 달려들었다그녀는 큰언니의 어깨를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아바마마를 빼앗다니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는 혼절하셨어그리고 깨어나시지 않아.”

?”

레보스호가 키 드레이번에게 나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지셨어우리는 일단 그 소식을 숨기고왕가의 근친들끼리의 회의였어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선 거야그래네가 오해를 할 정도로 나는 왕위에 대한 집착을 보였으니까내가 왕위계승자로 행동하는 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어그래서… 유리?”

율리아나는 더 이상 큰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녀의 눈앞에는 더 이상 큰언니의 얼굴은 없었다대신 다른 얼굴이 있었다그 얼굴을 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던 율리아나는 그것이 키 드레이번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

 

인간은 외적인 상황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에티카, 4정리 3. 인간이 존재를 지속시키는 힘은 제한되어 있으며또한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하여 무한히 압도당한다), 이것은 인간이 무한한 자연의 인과 안에 위치하기 때문에 필연적이다작품 내에서 에름은 이루미나를 안을 수 없으며아르파데일은 라힘턴 3세를 깨울 수 없다그러나 이러한 각자의 한계 상황에 마주하여에름이 이루미나에 대한 사랑과 그에 따른 고통을 동시에 긍정할 때아르파데일이 율리아나에 대한 증오와 사랑을 동시에 긍정할 때율리아나는 그들에게서 키 드레이번의 얼굴을 목격한다율리아나에게 있어 키 드레이번은 인과나 필연성 그 자체이며무엇보다도 인과에 의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현실 자체를그리고 그것에 의해 필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태도이다.

 

키 드레이번 자신은 누군가의 죽음의 원인이 되어주는 일을 긍정하고키 드레이번을 마주한 사람들은 키 드레이번을 통해 비춰지는’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그리고 그 외의 다른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그는 죽음의 원인은 될지언정 이유가 되고자 하지 않고신에게 빚지지 않으며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키 드레이번의 정체성은 인과와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는 실존적 수준에서의 현실 그 자체이며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오스발을 앞에 두고 나눈 세실리아와의 대화에서 그가 긍정과 부정에 대해 그토록 열변을 토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그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선 끝없는 거미줄의 형태로 전 세계의 모든 요소들을 얽어내며 그에게 환불조치를 요구하는(율리아나)’ 현실을 긍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세실리아에게 있어서는 다르다그녀에게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자신과 접촉하고 있는 필연성을 긍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그녀에게 있어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것이야말로 생의 진리라고 느껴지는 무언가는그녀에게 아직 도달하지 않아 분리된 것처럼 느껴지는그러나 동시에 이미 그녀의 바로 곁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무언가이다그리고 이러한 세실리아의 희구와 마찬가지로사실 키 드레이번에게도 그것을 해결하길 원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바로 오스발이다.

 

키 드레이번의 추적행은 실존적 현실로서의 자신이 긍정할 수 없는 존재인 오스발을 긍정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작품에선 그 노력이 매우 범속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그 범속한 방식이란 죽음을 말한다현실적인 인과로부터 붕 떠있는 존재인 오스발을 현실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역시 그를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는 필연성으로 옭아매는 것이다어쨌건 개념의 소거든 확장이든(펠라론 게이트), 혹은 자기합리화든 설명이든(세실리아간에 미지의 것을 긍정하는 방법인건 마찬가지니까단지 키 드레이번은 소거하는 방향으로세실리아는 확장하는 방향으로 긍정하고 싶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그렇다면 이렇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오스발은 어떤 존재인가? ‘자유를 상징하는 캐릭터라고 말하는 것은 부족하다핵심은 오스발을 인과의 연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키 드레이번을 알아보기 위해 세실리아를 동반했던 것처럼 오스발을 알기 위해 참고하기에 좋은 인물이 있다바로 바탈리언이다세실리아가 마법과 하이낙스를 통해 관 속에 몸을 누이기 위한 기나긴 도정으로서의 생에서부터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 했다면바탈리언은 결국 표현된 순간부터 죽은 과거가 되는 죽은 언어를 통해 살아있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한다그리고 그 둘은 그 결과 허무감만을 느끼게 하는 기계적 인과로서의 세계만을 발견할 따름이다그러나 그들은 각각 키 드레이번과 오스발을 통해 허무주의에서부터 빠져나올 희망을 발견한다희망을 목도한 후 그들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세실리아는 키 드레이번을 통해 현재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의 행보를 따른다반대로 바탈리언은 오스발과의 대화 이후 허무함만을 느끼게 하던 삶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를 떠나 다시 자신의 길을 걷게 된다우리는 키 드레이번을 통해 (세실리아처럼진행하고 있는 현실 너머에 긍정할 수 있을 만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예감한다그런데 오스발을 통해서는 (바탈리언처럼그것이 바로 진행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발견될 것임을 깨닫는다마치 펠라론 게이트가 우리를 현실 너머의 천국으로 인도하지만그 문을 통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실존의 층위에서의 인과와 필연성을 나타내는 키 드레이번의 반대편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오스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현실의 인과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현재적으로 작동한다고 느껴지는 것인과의 내에서 실존하는 모든 것이 이전에 있던 것의 단순한 결과라는 의식을 넘어실존하는 모든 것이 발생하는 출발점일 수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우리는 이미 위에서 현상자아능동-수동의 관념이 모두 이차적(二次的)인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바로 잠재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인과적 필연성에 의해 짜인 현실은 잠재성으로부터 유래하지만 잠재된 모든 의미/방향을 현실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비유하자면그것은 직선 위에 잠재된 하나의 점과 같다점은 직선의 공간을 직접적으로 점유하고 있지 않다그러나 이미 그어진 직선 속에 우리는 무수히 많은 점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그리고 잠재된 점은 자신의 오른쪽 방향(의미)으로도왼쪽 방향(의미)으로도 갈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현실화되면 그것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어느 한 쪽 방향으로 정해져 현실화된다.

 

중성(中性혹은 본질의 세 번째 상태의 패러독스두 번째 패러독스는 이번엔 우리를 필연적으로 세 번째 패러독스에 빠뜨린다왜냐하면 만약 명제의 이중체로서의 의미가 긍정이나 부정과 무관하다면그것이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면명제의 어떠한 양태도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의미는 질의 관점에서든양의 관점에서든관계의 관점에서든양태의 관점에서든 간에서로 대립하는 명제들에 대하여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왜냐하면 이 모든 관점들이 지시 작용과그리고 [실존하는개물들의 상태에 따른 그것(지시작용)의 적용이나 점유의 다양한 측면에 관련되는 것이지의미나 표현에 관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우선 질과 그 긍정과 부정의 경우신은 존재한다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의미가 지시된 대상과 무관하게 독립성을 가지기 때문에동일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이것이 바로 14세기 당시에 질책의 대상이 된니콜라 도트르쿠르의 환상적인 역설이다contradictoria ad invicem idem significant.[서로 대립되지만의미는 같다] () (의미의 논리, 5들뢰즈. [] 안은 필자가 추가)

 

위에서 필자는 키 드레이번의 추적행이 자신이 긍정할 수 없는 존재인 오스발을 범속한 방식으로 긍정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키 드레이번이 현실성을오스발이 잠재성을 의미한다고 분석한 지금우리는 그것을 다시 이해해볼 수 있다실존의 층위에서 현실은 실존하는 모든 개물들의 상호연쇄를 통해 진행된다(에티카, 1부 정리 28, 스피노자모든 개물 또는 유한하고 일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각각의 사물은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일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다른 원인에 의하여 존재하고 어떤 효과를 생산하도록 결정되지 않는다면존재하거나 효과를 생산하도록 결정될 수 없다이 원인도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일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다른 원인에 의하여 존재하고 어던 효과를 생산하도록 결정되지 않으면존재하거나 효과를 생산하도록 결정될 수 없다이처럼 무한히 진행된다). 이것이 바로 인과적 필연성으로 구성되는 키 드레이번의 현실이다그러나 동시에 현실은 아직 현실화하지 않았던 잠재성이 추동하여 이행된 실존이다(에티카, 1부 정리 18.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 1부 정리 25. 신은 사물의 존재의 운동인일 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의 운동인이기도 하다). 잠재성은 끊임없이 일정한 방향으로 현실화된다즉 현실은 실시간으로 잠재성을 현실화라는 방법을 통해 소진시키려고 한다결국 키 드레이번의 오스발에 대한 추적은 끊임없이 잠재성을 소진시키고자 하는 현실의 진행원리에 대한 유비로 볼 수 있을 것이다들뢰즈는 이것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그러나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사물 대신 이런 사물을 상상해보자이 사물은 자신을 어떤 사물과 구별하려고 하는데그 어떤 사물은 자신을 이 사물과 구별하지 않는다예를 들면 번개는 검은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오려 하지만결국 그 하늘을 같이 끌고 가야만 한다이는 마치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것과 같다말하자면 바탕이 바탕이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차이를 만든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차이는 만드는 어떤 것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차이와 반복들뢰즈, 1)

 

바탕이 되는 검은 하늘에서 하얀 번개가 현실화되지만그 번개는 다시 배경인 검은 하늘을 엿볼 수 있게 한다번개는 검은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오거나검은 하늘을 모두 번개로 채우려 하지만항상 여분의 바탕을 남길 수밖에 없다마치 키 드레이번이 끊임없이 오스발을 추적하지만결코 오스발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폴라리스 랩소디의 자유와 복수 개념은 이로써 잠재성과 현실의 개념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

by 데오늬달비 | 2018/10/06 09:54 | books | 트랙백 | 덧글(0)

'오버 더 초이스'를 분석해보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다른 생물들과 차별적인 인간의 정의가 무엇인지라는 물음은 유서 깊은 주제이다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정의는 부족하다모든 생물은 생각을 한다그것이 인간만큼 커다란 용량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한 복잡성 역시 가지지도 못할 뿐인간의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몇몇 사상가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헤겔은 말한다동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오직 죽음으로써만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장애로 인식할 수 있으며그럼으로써 새로운 상태로 이행할 수 있다지양(止揚, Aufheben)은 자기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즉 현재적 자신의 죽음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의식하고그를 극복함으로써 존재한다하이데거의 논의는 어떨까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자신이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현존재이다(죽음의 인식을 통한 실존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는단지 존재할 뿐 실존하지는 못하는 단순한 존재자일 뿐이다). 자신이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불안이 자신의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인 의문을 던지게 만들며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만이 현존재이다하지만 또한 아직은 죽음에 도달하지 않았기에아직 무()라는 완결에 도달하지 못한 미완성자이기에 현존재는 스스로를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인식하기도 한다이 가능성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행위아직 완결되지 않았기에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행위를 기투(企投, Entwurf)라고 한다. 

헤겔의 자기부정과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두 개념에는 물론 차이가 있다헤겔의 지양은 궁극적으로는 절대정신을 예비한다헤겔이 역사의 완성과 같은 궁극적인 진리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이유이다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운동은 운동하는 척 하지만 결국 다시 절대정신으로 재귀결하는 가짜운동이라는 비난도 듣게 되는 것이다반면 하이데거의 기투는 무/죽음 이외의 것을 예비하지 않는다한 현존재가 자신의 죽음이라는 완결에 도달하기 전까지 행하는 모든 행위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함도 아니다그것은 바로 그 현존재가 본래적인 자신을 찾기 위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다두 사상가 공히 죽음은 스스로를 미완성의 존재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문제적 요소이자 그래서 그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유도하는 시발점의 역할을 한다그래서 그들에게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안고 사는 존재이다그러나 이들과는 다른 방향을 가진 사상도 있는 법모든 행위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한 결과일 뿐이며죽음은 단순히 존재자가 외부로부터 우연히 재수 없게 마주치는 불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스피노자가 그렇다. 

에티카의 4부 정리 64에서 그는 악의 인식은 부적실한inadequate 인식이라고 말한다스피노자에 있어 악즉 나쁜 것은 우리의 신체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다시 말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부적실한 인식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통해 얻은 인식이 아닌 수동적인 원인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인식을 뜻한다결국 우리의 신체의 실존을 배제시키는 관념은 우리의 정신에 존재할 수 없으며오히려 그 관념은 우리의 정신과 반대된다’(에티카」 3부 정리 10)는 근거에 따라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본성적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무능력한 존재 혹은 미완성/불완전의 존재로 인식할 수 없다그런 인식은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우연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에티카」 3부 정리 15. 어떤 것이든 간에우연에 의해기쁨이나 슬픔 혹은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슬픔이 인간에게 본성적일 뿐만 아니라 슬픔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추동한다고 말하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방식 자체를 부정한다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는 것자신의 존재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진정 자연적인(natural) 존재방식이며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다른 생물 사이에는 본성(nature) 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단지 인간은 후천적으로 본성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습관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지만, ‘습관을 들이는 습관l’habitude de prendre des habitudes’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그러나 습관 자체를 자신의 본성으로 오해하곤 한다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예속을 내속화하고그럼으로써 존재자들 중 가장 본성에서 먼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이러한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스스로 죽음을 품지 않으며그래서 긍정과 기쁨으로 삶을 찬양하는 존재자이다그렇다면 식물은 어떠한가우리는 식물이 동물보다도 더 죽음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자임을 알 수 있다식물만큼이나 생명력의 정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식물은 가지를 잘라내도 가지를 다시 만들어내고가지를 잘라낸 부위에 다른 가지를 접붙여도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나무의 밑기둥만 남겨두어도 그 그루터기에서 새로 싹을 내기도 하고반대로 뿌리를 잘라내도 뿌리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한다자기 자신으로부터 난 묘목을 포함한 다른 생물의 죽음에는 (심지어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도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지만자신의 생명력을 뻗어내는 데엔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식물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긍정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물일 것이다이러한 식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몰이해가 덴워드 이카드나 테나 포인도트의 식물왕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그들은 식물왕이 삶과 죽음을 수단화할 것이라 생각한다그러나 그것은 행위에 이유나 목적을 붙이는데 익숙한 사람의 방식일 뿐이다식물에게 있어 삶은 목적이자 동시에 수단이다그들은 목적 없이 단지 자신의 능력껏 살아간다. 

하지만 식물조차도 어느 정도까지는 죽음을 느끼고 있다어느 생물이나 죽음을 피하려 하며그것은 식물도 마찬가지이다비록 열매의 죽음을 이용해 씨앗을 퍼뜨리는 것에서 볼 수 있듯 놀랍도록 죽음에 초연한 식물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조차 기본적인 자기방어를 갖추는 경우가 있으며그것은 식물이 죽음을 피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왜 독초가 독을 품으며고추는 매운 맛을 내는가그것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식물의 방어기제이다야채 뱀파이어가 어떻게 식물을 조종할 수 있는가뱀파이어가 죽음을 통해 사람을 매혹하듯야채 뱀파이어가 식물을 매혹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그리고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누가 죽음을 느끼는가? ‘가 느끼는 것이 아닌가그런데 식물의 존재방식이 인간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식물의 자기정체성 역시 인간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다르다식물에 있어 의 외연은 인간의 그것보다 더 넓은 것처럼 보인다독초가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독초의 죽음을 피하게 해주진 않는다개별적인 독초는 언제든 먹힐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먹힘으로써 그 외의 다른 독초들은 먹히지 않을 수 있다개별적인 독초의 죽음은 종으로서의 독초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마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요한 복음」 12장 2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재인용).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이보다 더 잘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까어쨌든 식물은 같은 종의 다른 식물들을 자신으로 여길 수 있다더욱이오버 더 초이스에서는 그 이상의 외연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실포 언덕의 식물들은 종을 뛰어넘어 다른 식물이 되기도 하며비누풀이나 마가목은 티르를 통해 계를 뛰어넘어 다른 동물이 되기도 한다우리는 왜 비누풀 등이 스스로를 종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며 또한 그 이상이기도 하다고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식물의 자의식의 개념은 너무나도 넓고 고정되어있지도 않다식물의 존재방식이 역동적인 생명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버 더 초이스의 읽다보면스토리 전개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소설이 하나 떠오른다도스또예프스끼의 우스운 자의 꿈이 그것이다허무주의자인 주인공은 어느 날 자살을 결심하는데바로 그 날 거리에서 불쌍한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그날 밤 자살 직전 그 소녀의 기억이 주인공을 괴롭히고자살을 미룬 뒤 깜빡 잠에 든 그는 꿈을 꾸게 된다꿈에서 그는 유토피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행성에 떨어진다그리고 그 유토피아는 그 이방인의 존재 때문에 점점 거짓과 증오이기심을 배우며 타락하게 된다우스운 자의 꿈은 (물론 사회주의적 이상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지만사람이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다루는 계보학적인 주제의 환상소설이며이런 측면에서 이 두 작품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오버 더 초이스에서 이러한 타락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전대미문의 화산폭발 위기 앞에서 식물은 마치 인간과 비슷하게 죽음을 느끼게 된다그 위기의 결과가 개별 식물의 죽음이 아닌 전 생물의 죽음이기 때문이다우리에게 있어 손톱의 배제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듯 식물에게 있어 동물이나 한 종의 식물의 죽음은 식물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그러나 전 생물의 죽음은 식물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다그래서 228그루짜리 손톱을 떼어내는 방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논리적 방식을 통한 판단은 앞서 말한 식물의 자연적인 방식이 아니며, 따라서 사람의 사고방식을 배울 필요성이 제기된다식물의 이 배움이 식물의 타락을 낳게 된다식물은 사람들의 죽음(서니/지데/션 등)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고정적인 자아(몇몇 종의 식물들로 대표되는)를 형성하며이에 이기심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식물의 타락은 어떤 삶도 긍정하던 자신의 존재방식에서 벗어남이다. 

또한 식물에 의한 부활은 목가적인 개척마을의 타락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부활은 죽음의 이용을 가능케 하며이는 삶의 독특성을 잃는 결과를 낳는다부활의 입증을 위한 미레일 살해 도모실포 언덕의 재앙적 변화를 무마하기 위한 제물 봉헌으로서의 테나 포인도트 린치전 세계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서의 휴스트라넬과 페르다이할 소환 등은 삶에 무게를 재기 시작함에 따라 유발된 결과들이다사람의 타락은 삶의 가치상실이다. 

소설은 의외의 방식으로 싱거운 결말을 맞이한다그러나 마지막 서니(혹은 비누풀)와 티르의 대화는 흥미로운 편이다죽음과 부활을 통해 타락한 식물과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우선 식물의 경우는 매우 단순하다. “살아 있어야 잊지.” 호부왕을 선출했으니 죽음에 대해 잊으면 된다는 것이다휴스트라넬과 페르다이할이 돌아간 이후 실포 언덕은 원래대로 돌아갔고티르는 더 이상 비누풀과 대화할 수 없으며부활한(것처럼 보였던사람들은 식물로 돌아갔다식물은 필요한 만큼 지각한 후 나머지는 잊는 방식으로 그들의 긍정적인 삶을 되찾는다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사람은 식물과 같은 방식을 취할 수 없다. “너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될 수 없어.” 이 대사는 필자의 생각에 이 작품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사람은 개별적으로 자아를 가지며또 기억할 수 있다그래서 사람은 베르그송의 말처럼 습관을 만들며 살아간다사람은 식물처럼(혹은 퓨처 워커의 바람처럼?) 휴지(休止없이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습관에 머물고 그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다새로운 습관을 만들며 변화해야 한다사람이 예속되지 않으면서도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그것은 바로 과거를 긍정하는 것이다. “나 생각보다 자주 서니 이야기할 거 같다.” 이 긍정은 헤겔과 하이데거의 방식이 전혀 아니다이 긍정은 서니의 죽음을 슬픔극복해야할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이것은 물레를 돌리는데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자르고그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 조르바의 태도이다더 나아가 이 긍정은 궁극적으로 영원회귀를 맞이하는 니체의 긍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최고의 긍정의 형식”(김재인들뢰즈 커넥션서문)이라고 니체가 말할 때의 바로 그 긍정이다죽음을 마주해서도 그것을 기쁨으로 긍정하는 초인의 태도가 작품이 제시하는 죽음을 극복하는 사람의 방식이다. 

이제까지 오버 더 초이스를 간략히 분석해보았다작품을 한 번 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아직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 많은 이야기가 다른 독자들에 의해 나타날 것이라 기대한다마지막 부분은 작품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아쉬움과 약간의 잡담을 늘어놓고자 한다.

긍정과 기쁨으로 가득한 삶즉 식물이 죽음을 지각할 때 그것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에 타자는 흥미 있는 답변을 제시한다즉 죽음을 지각하고 있는 다른 존재자를 모방한다는 것이다가장 순수한 생명력만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즉 아기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결국 어른을 모방하여 자아를 형성하는 걸 볼 때 답변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그러나 형성된 자아가 단순히 잊음으로써 소멸하는 것은 상술했듯이 너무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나에겐 계몽이 신화가 되고그것은 오직 또 다른 계몽을 통해서만 빠져나올 수 있다는(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개념’)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의 방식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식물이 식물계(혹은 생물전체의 죽음을 어떻게 예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아쉽다물론 필자는 죽음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개념이라는 것에 동의한다그러나 비누풀이 서니를 통해마가목이 지데를 통해 등등 개별 종들이 어떻게 죽음을 지각하는지는 다뤄지는 데에 비해 식물계 전체의 죽음을 식물이 어떻게 지각하는지는 그려지지 않는다죽음이 외부에서 우연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일까아니면 이 점은 단지 필자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또한 필자의 오해일지는 모르나타자는 자아가 죽음을 통해 형성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이 있는지 필자는 잘 모르겠다혹시 한 자아에게 죽음이 최초로는 어떻게 지각되는지아니면 죽음을 지각하기 때문에 자아가 형성되는지에 대한 작품을 언젠가 타자가 집필할지도?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마지막으로아니제이인 니바이 알루스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작품의 말미에는 식물왕으로 선정된 228그루의 이름 모를 식물이 니바이를 통해 종을 보존할 것이라는 강력한 암시가 나타난다물론 그 이전에 이미 션 그웬이 이에 대해 독자에게 살짝 귀띔하기도 한다. “주어진 시간이 대충 20년에서 2,000년인데만약 재난의 도래가 뒤쪽에 가깝다면 그 식물은 멸종하기 전에 번식 능력이 더 괜찮아진 돌연변이 후손을 남길 시간을 벌 수 있을 지도 모르죠.” 그런데 어떤 식물은 자웅동주(雌雄同株)이다니바이는 도대체 왜 하필이면 여장한 티르에게 강력한 성욕을 느끼는 걸까혹시 니바이는 단순한 암컷이 아닌 자웅동체에게 특별히 매력을 느끼는 아니제이가 아닐까그렇다면 니바이가 그 식물에게 성욕을 느끼고 변신하게 될 이유는 식물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격차를 뛰어넘을 만한 그의 그리스적 성적 취향일 것인가? (어쨌든 우리는 아니제이를 통해서라도 생존할 방법을 찾는 식물의 놀라운 생명력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이 글은 니바이에게 바치는 곡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Genesis의 Fountain of Salmacis. (~07:24)


by 데오늬달비 | 2018/07/02 05:22 | books | 트랙백 | 덧글(0)

스피노자로 본 이영도. 이영도로 본 스피노자.

0. 타자가 오랜만에 새로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합니다제목은 오버 더 초이스라네요오랜만에 접하는 타자의 위트가 아직 좀 낯설긴 하지만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기왕이면 몰아서 봤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제 개인적인 타자와 관련된 글은 피를 마시는 새를 분석해 보자가 마지막이었는데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좋은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들뢰즈에 대한 이해가 아직 파편적일 때 쓴 것 같아서요.(지금은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겠죠하지만 그땐 열심히 쓴 것이었죠아직도 타자에 대한 제 기본적인 이해의 참조점은 그때와 달라지진 않았습니다스피노자와 들뢰즈가 그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도 사실 피를 마시는 새에 대한 이전 글과는 크게 내용적으로 달라지진 않았습니다단지 글을 씀으로써 타자와 스피노자들뢰즈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를 머릿속에만 부유하는 형태가 아니라 좀 더 단단하게 정리하고 싶었고그런 김에 그것을 공유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저는 스피노자를 제일 좋아하는데스피노자를특히 에티카를 읽으면 두 가지 감상이 들기 때문입니다세상을 알 것 같고나를 알 것 같죠. (스피노자에 대한 베르그송의 유명한 말이 있다죠. ‘모든 철학자는 두 개의 철학을 가진다자신의 것과 스피노자의 것.’ 이 사람이 저와 비슷한 감상으로 이런 말을 남긴지는 모르겠지만저는 제멋대로 그랬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그리고 저는 제멋대로 타자가 저처럼 스피노자를 좋아하고그 감상을 작품이라는 형태로 엮어낸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그래서 다시 한 번 스피노자를 중심에 두고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하지만 너무 큰 욕심을 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이전에 썼던 글들처럼 하나의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아우르기보다는 그저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작품의 부분들과 그에 대한 감상을 파편적으로 나열하고 싶습니다경험에 비춰보니중심을 잡다보면 힘이 들더군요.


1. 낙수가 바위를 뚫는 것일까 아니면 바위가 낙수를 받아들이는 것일까발생하는 물리적인 사건은 하나입니다낙수와 바위 간의 접촉과 그로 인한 상호간의 변화이겠죠그런데 이 사건에 참여하는 두 개체인 낙수와 바위는 각각 그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즉 낙수는 내가 뚫는 작용을 했다고혹은 받아들여지는 작용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죠마찬가지로 바위는 내가 뚫리는 작용을 받았다고혹은 받아들이는 작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이런 상반된 해석은 왜 발생할까요이유는 간단합니다이 두 개체가 자신뿐만 아니라 서로에게도 자신의 실존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타자의 작품 곳곳에서 이를 주장하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율리아나 공주와 이어진 무한한 거미줄용인이 된 륜 페이파지트 대선의 강론?) 하나의 개체는 그 개체를 포함한 모든 것에 자신의 실존을 의지하고 있고동시에 그 개체를 포함한 모든 것을 실존시키고 있습니다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동시에 결과가 되는 것이죠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접촉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이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위의 주체와 객체를 구분합니다낙수와 바위는 어떤 의도를 가지진 않고 단지 기계적으로 접촉할 따름입니다우리는 그것에 인간적인 관념을 이입시킬 뿐이죠한 개체의 다른 개체에 대한 실존에 있어서의 상호의지라는 원리가 과연 전 개체에 적용될 수 있을까요비루한 예로우리는 살인이라는 일방폭력적인 사건을 두고도 살인자와 피살자 간에 상호 원인/상호 결과라는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까타자는 시도합니다오스발과 파킨슨 신부파킨슨 신부와 퓨아리스 4세의 대화에서 살인은 타살과 자살 사이를 망설입니다죽음에 대해 성직자는 주체인가 객체인가혹은헨솔 추기경의 말처럼 순교는 강요되는 것인가아니면 키 드레이번과 세실과의 대화에서처럼 살인에 이유가 있을 수 있는가/없는가스피노자의 답은 뭘까요?


스피노자 스스로는 죽음이라는 예를 명확하게 다룬 바는 (제가 아는 한에서는없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대답을 이야기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주체일 수도 있고 객체일 수도 있다좀 더 스피노자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수동적일 수도 있고 능동적일 수도 있다스피노자의 이 설명을 이해하자면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스피노자는 각 개체들의 실존이 서로 다른 개체의 실존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에티카」 1부 정리 28. 모든 개물 또는 유한하고 일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각각의 사물은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특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다른 원인에 의하여 존재와 작용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도 작용하도록 결정될 수도 없다이 원인도 또한 마찬가지로 유한하며 특정한 존재를 소유하는 다른 원인에 의하여 존재와 작용으로 결정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작용하도록 결정될 수도 없다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된다그리고 2부 정리 7의 대담한 주장을 통해 이러한 원리를 연장 속성뿐만 아니라 사유 속성에도 적용시키죠. (2부 정리 7. 관념의 질서와 결합은 사물의 질서와 결합과 동일하다결국 마치 낙수와 바위가 그렇듯 살해자와 피살자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살인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동시에 수동적일 수도능동적일 수도 있습니다그런데 스피노자의 수동과 능동은 사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어떻게 다른 지 알아볼까요?

3부 정의 1.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에 의하여 명석 판명하게 지각될 수 있을 때 나는 이 원인을 적실한adequate 원인이라고 한다그러나 어떤 원인의 결과가 그 원인 자체에 의하여 이해될 수 없을 때 나는 그 원인을 부적실한inadequate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3부 정의 3.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적실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그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으로 이해한다. (볼드는 필자 강조)

스피노자에게 있어서수동과 능동은 어떤 자유의지에 의해 구분되지 않습니다오히려 스피노자는 매우 강력히 자유의지를 부정합니다. (1부 정리 32. 의지는 자유 원인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필연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스피노자가 그리 말하는 이유 자체가 스피노자 형이상학의 독특함이겠죠바로 내재성의 철학이라는 겁니다신은 만물의 원인이지만간접적인 원인이 아니라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죠타자의 작품 속에 이에 대한 대단히 뛰어난 비유가 있습니다눈물을 마시는 새에 나오는데요. “글쎄요봄은 새싹 속에 있습니까새싹 속엔 분명히 봄이 있습니다만.” 스피노자는 분명히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1부 정의 6)’라고 이야기합니다그러나 이것을 절대로 위의 비유가 등장한 상황에서의 비형처럼 신이 천상이나 초차원에 있다고 이해해선 안 됩니다앞에서 인용한 에티카」 1부 정리 28은 개체의 실존이 서로에게 의지한다고 말하며그렇기 때문에 신이 개체들의 실존 자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독자가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스피노자는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1부 정리 18)’라고혹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무한하게 존재하는 모든 양태는필연적으로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에서 생기거나 아니면 필연적이며 무한하게 존재하는 일종의 양태적 변용으로 양태화한 어떤 속성에서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1부 정리 23)’즉 신이 모든 개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어떻게 두 개가 양립할 수 있을까요들뢰즈는 언젠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인 한에서En tant que의 철학이라고 언급합니다.(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요신은 속성에 의해 무한하게 변용되는 한에서 만물의 원인이고 동시에 결과입니다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물의 관념은신이 무한일 경우에 한해서가 아니라 신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개물의 관념으로 변용한 것으로 고찰되는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소유하며이 관념도 역시 신이 또 다른 제 3의 관념으로 변용한 한에서 신을 원인으로 소유하고... 이처럼 무한히 진행된다(2부 정리 9)’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새싹 속엔 분명히 봄이 있습니다하지만 봄은 새싹에만 있지 않고 꽃에도 있고사람들의 옷차림에도 있으며자연 그 자체인 만물에도 있죠.(스피노자적인 한에서En tant que’라는 개념은 발자국 없는 여신과 나가 수호자들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준 것처럼 보이죠왜 각 수호자는 여신에 대해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지는가아마도 여신은 륜 페이로 변용된 한에서는 라르간드일 뿐이고화리트 마케로우로 변용된 한에서는 세파빌일 뿐이며보트린 아세리도로 변용된 한에서는 레졸디일 뿐이기 때문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각각의 개체를 모두 아우르는 만물의 운행이 모두 신에 의한 결과라고 말하고(1부 정리 31. 현실적 지성은 유한하든 무한하든 간에 의지욕망 사랑 등과 같이 생산하는 자연이 아니라 생산된 자연에 포함된다고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로 정신 안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오히려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을 의지하도록 어떤 원인에 의하여 결정되며이 원인 역시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결정되고이것은 다시금 다른 원인에 의하여 결정되며이렇게 무한히 진행된다(2부 정리 48)’라고 자신 있게 말하게 됩니다그래서 자유의지를 기준으로 능동과 수동을 정의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선 불가능합니다모든 행위가 신을 원인으로 가지는 필연적 행위인데 어떻게 자유의지가 끼어들 수 있을까요그래서 자유의지는 사실 부적실한 관념입니다우리는 자유의지에 의해 김치를 좋아할 수 있고또 오늘 점심에 자유의지에 의해 설렁탕을 먹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좀 더 적실한 원인을 찾자면내가 어렸을 때부터 김치를 먹어왔기 때문에 김치에 대한 취향이 형성된 것이고어제 점심에 설렁탕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어제 점심에 먹은 설렁탕이 너무 맛있었기 때문에 설렁탕을 선택한 것입니다(1부 정리 32. 의지는 자유 원인이라 할 수 없고 단지 필연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하나의 취향/선택이라는 무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다른 관념들이 원인으로서 투입되었을까요스피노자라면 무한히 많은 관념들이 무한하게 진행된 결과라고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왜 능동과 수동이 관념의 적실성을 기준으로 판가름 날까요우리는 모든 사건들이 (스피노자의 표현대로라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이 각각의 개체로 변용된 한에서’ 원인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사실을 압니다그리고 하나의 사건에서 적어도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각 개체들은 서로가 원인이자 결과가 되며또한 그 개체들은 또 다른 개체들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이처럼 무한히 진행된다는 것을 알죠그렇기 때문에 물방울과 돌의 마주침은 서로가 원인이자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낙수의 능력으로 바위를 뚫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낙수에 대한 바위의 작용을 무시하는 관념이 될 것이며또한 낙수의 능력 자체마저 고려하지 못한 관념이 될 것입니다낙수의 바위 뚫기는 바위의 받아들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발현할 수 없는 능력이기 때문이죠(2부 정리 16. 인간의 신체가 외부의 물체에서 자극받는 방식의 모든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동시에 외부의 물체의 본성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과적으로 낙수가 무엇인지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바위를 뚫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낙수는 바위 뚫기라는 사건에 있어 자신을 원인으로 하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이며그 사건에 있어서 자신에 대한 수동적 관념밖에 지니지 못하는 것입니다(2부 정리 28. 인간 신체의 관념은 단지 인간 정신에만 관련되는 한에서는 명석 판명하지 않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바위가 바위 뚫기라는 사건의 원인을 낙수와 바위 자신으로 공히 생각한다면즉 적실한 관념을 가지게 된다면 바위는 그 사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원인 삼을 수 있게 되고결국 능동적이게 됩니다(3부 정리 3. 정신의 능동은 오직 적실한 관념에서만 생기지만수동은 부적실한 관념에만 의존한다). 그렇다면 오스발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적실한 관념을 가진다면(자신은 율리아나 공주의 노예이며키 드레이번에게 원한을 산 바 있고자신이 죽지 않으면 에름 후작이 죽을 것이고이루미나 후작 부인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키 드레이번은 자신의 목숨구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이처럼 무한히 진행된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겠죠우리는 이러한 죽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개죽음희생순교?


(이 문단 이후는 건너뛰고 싶으신 분은 건너뛰셔도 됩니다위의 설명은 충분히 스피노자적이긴 하지만충분히 현대적이진 않아 보입니다스피노자는 시대를 뛰어넘을 만큼 충분히 천재적이었지만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에 의해 더 나아갈 수 없는 지평이란 게 있죠스피노자의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제 생각엔칸트가 잘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칸트는 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 등을 묶어 그들의 철학을 합리론이라고 칭했다죠(출처가 명확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칸트가 언급한 합리론과 경험론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합리론과 경험론은 공히 자연에 어떤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그런데 합리론은 그 자연의 원리가 인간이성과 합치한다고 생각합니다즉 자연의 원리와 인간이성은 일원론적이죠그래서 합리론의 노력은 이미 내생적인 인간이성의 발견에 있죠반대로 경험론은 자연의 원리와 인간이성은 같은 원인을 갖지 않으며이원론적입니다그래서 경험론의 노력은 자연의 원리와 합치되는 인간이성의 발명입니다이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의 모순은 (자신의 말에 따르면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의해 해결됩니다그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에 의해 촉발된 경험에 국한된다고 말하죠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촉발된 현상의 감각 및 그 감각자료들의 분류와 판단은 모든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는 일종의 인식의 틀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초월적 감성론 및 초월적 분석학). 즉 판단행위에 있어서 (발명적인경험을 부각시킴과 동시에이전 철학에는 자연에게 부여되었던 초월적인 원리를 인간의 감성 및 오성의 영역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인간이성의 합리성을 성공적으로 구제해냈습니다자연중심적(혹은 신 중심적사고에서 인간중심적 사고로의 위대한 전환은 스피노자의 한 은밀한 제자로 하여금 이론적인 도약을 이루어내게끔 도왔습니다그의 이름은 니체입니다.


자신의 철학적 지평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스피노자의 놀라운 과감성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그의 설명에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낙수라는 개체와 바위라는 개체가 우선 있고그 다음에 그 둘 간의 접촉이 있어서그 결과로 변화가 나타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순서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접촉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고그 다음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그러고 나서 낙수와 바위라는 두 개체를 전제한 후마지막으로 두 개체에 변화라는 결과를 적용시키고 있지 않은가스피노자는 (아마도 그가 살던 시대의 한계 때문에관념이 인간의 외부에(궁극적으로는 신에있다고 전제했고그에 비해 인간은 태어날 때엔 수동적인 관념밖엔 지니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5부 정리 39. 주석 중그리고 실제로 어린아이나 소년처럼 가장 적은 것에 적합하고 외적 원인에 가장 많이 의존하는 신체를 가진 자는그 자체만으로 고찰할 때 자신과 신과 사물에 대해서 거의 의식하지 않는 정신을 소유한다). 스피노자 철학의 재미있는 점은 합리론의 비전을 가지면서도(우리가 자연의 원리를 인식할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 경험론의 방법을 채용한다는 점이죠(우리는 부단한 탐색의 끝에서야 드물게 자연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 니체는 신으로부터 실존의 원인을 찾는 스피노자와는 다릅니다많은 부분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고그래서 부분부분 스피노자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그는 스피노자의 저 전제 자체에 커다란 권태를 느끼게 되죠그리고 칸트의 전환에 힘입어관념이나 원리가 외부에 없다어떤 것도 미리 세워지지 않은 바닥어떤 질서도 없이 서로 뒤엉켜 있는 대지만이 발견된다고 말합니다그러므로 사람은 거기에서 사건을 포착하고그 사건을 인위적으로 잘라서가치평가를 통해 사건으로부터 관념을 생산할 정당성을 가지게 됩니다이렇게 비유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사건은 입니다이 점으로부터 사람은 온갖 방향으로 선을 긋기(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평가하기시작하는 것이죠줄거리에서 사건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사건에서 줄거리를 그어나가는 이 역동적인 운동이야말로 니체를 위대한 예술가이자 철학자로 만드는 덕목이 아닌가 합니다그래서 니체의 책들은 논리적인 줄거리를 가지진 않고 잠언의 형태로 쓰인 사상적 사건들/점들로 이루어져 있죠개인적으로 이러한 운동의 양상을 목격하기 위한 좋은 작품으로 (비록 니체의 것은 아니지만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2.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레콘과 도깨비의 화신은 인간의 화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화신은 그들을 인식할 수 있죠왜 그럴까요이전에 제가 쓴 눈물을 마시는 새에 대한 글에서인간의 특징이 관계짓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피를 마시는 새」 17챕터의 제사에서도 제이어 솔한이 바둑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언급하는 것 같네요인간의 이 특징이 작품 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신들 사이에 기묘한 인식의 일방성을 삽입한 것일까요그런데 이 관계짓기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인간만의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어 보이긴 합니다그럼 이 관계는 단순히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한 장치인 걸까요?


스피노자의 철학 중 굉장히 조심해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바로 평행론인데요우리는 흔히 (앞에서도 말했지만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여 행동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내가 점심메뉴를 설렁탕으로 먹는 것은 내가 점심에 설렁탕을 먹겠다고 생각해서’ 내 몸을 설렁탕을 먹도록 조종했다는 식이죠하지만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이러한 사유 속성의 연장속성에 대한혹은 의지의 육체에 대한 우위를 거부합니다모든 것의 직접적인 원인은 실체 자체이지 다른 속성이 아닙니다오히려 각 속성 사이에는 어떤 직접적인 연관도 있을 수 없죠(2부 정리 6. 각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로 되어 있는 속성에서 신을 고찰하는 한에서만 신을 원인으로 소유하며신이 다른 어떤 속성에서 고찰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단지 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통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고(1부 정의 6)’, 바로 실체라는 동일한 원인을 공유하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같은 질서와 결합(2부 정리 7)’을 가집니다.(인식론적 평행론하지만 우리는 이 원인에 대한 무지로 인해 우리가 생각을 통해 육체를 지배한다는 부적실한 관념을 가지게 되는 거죠그런데 스피노자는 이 2부 정리 7의 보충과 주석을 통해 이러한 평행관계가 단지 사유와 연장의 두 속성뿐만 아니라 실체가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에 대해서’ 성립한다고 말합니다(2부 정리 7. 보충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 동일한 질서에서 그리고 동일한 결합을 가지고 신의 관념으로부터 신 안에서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예를 들어 X와 Y라는 또 다른 속성이 있다고 가정한다면(물론 우리는 연장과 사유라는 두 속성만을 인식할 따름입니다만), 연장 속성인 물체 a와 속성에서의 a, Y 속성에서의 a, 그리고 관념 a가 동일한 질서와 결합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이죠.(존재론적 평행론)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a에 대한 관념은 a에 대해 하나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각 속성에 대해 각각 표상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이 상황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내들러에티카를 읽는다, pp.215~216)

속성

사유

연장

X

Y

양태

a에 대한 관념

물체 a

X(a)

Y(a)

이 아니라

속성

사유

연장

X

Y

양태

물체 a에 대한 관념

X(a)에 대한 관념

Y(a)에 대한 관념

물체 a

X(a)

Y(a)

즉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관념들 자체는 양태들이 그들 각자의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것과 같이 신 관념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들뢰즈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p.160)’는 거죠신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무한한 속성으로 표현합니다이때 신은 각 속성들을 표현하는 능력을 가진 신이며신의 이러한 능력을 활동 역량la puissance actuelle d’agir이라고 말합니다그러나 또한 신은 사유 속성을 통해 각 속성들을 표상적으로(대상적으로objectivement) 표현하며이러한 능력을 신의 사유 역량la puissance de penser de Dieu이라고 말하며사유 역량으로 인해 표상된 신의 사유를 신 관념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의 인간의 신을 보고 포착한 스피노자와의 공통점이 바로 이것입니다각 속성들은 활동 역량을 고려했을 때 다른 어떤 속성들과도(심지어 사유속성마저도연관을 가지지 않습니다(2부 정리 6. 각 속성의 양태는 그것이 양태로 되어 있는 속성에서 신을 고려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신을 원인으로 소유하며신이 다른 어떤 속성에서 고려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각 속성은 각자의 질서와 결합의 연쇄에 의해서만 존재합니다그러나 사유 속성은당연히 사유 속성만의 질서와 결합에 의해 존재합니다만그만이 가지는 사유 역량의 덕택에 사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속성의 양태들을 자신의 대상으로서 표상함으로써 존재합니다마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신들이 서로를 절대 인식할 수 없지만어디에도 없는 신은 그들 각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서로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신들과 그들 각각을 따로 인식할 수 있는 어디에도 없는 신의 관계를이러한 활동 역량에서 고려된 각 속성과 사유 역량에서 고려된 사유 속성의 관계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이러한 가정은 가외의 해석을 더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시우쇠의 말에 의하면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유해의 폭포는 어디에도 없는 신의 능력을 빌려 쓰고 있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능력은 어떤 능력일까요인간의 신이 사유 속성의 비유라면그 능력은 사유 역량일 수 있지 않을까요? ‘석벽을 타고 흘러내리던 작은 어느 날인가 자신을 자각했던 것인간의 신으로부터 사유 역량을 분유하여 자신의 신체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요더 나아가이 유해의 폭포는 재미있게도 폭포를 이루는 육체 전체에 대해 통합적인 자아를 가집니다마치 스피노자의 신이 연장 속성에 있어서 무한한 양태로 변용되는 한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무한한 자아(즉 사유 혹은 관념)로 변용되는 것처럼 말입니다그래서 유해의 폭포는 마치 신처럼 자신을 이루는 육체들 각각에 대해 나 혹은 나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겠죠우리는 이렇게 신처럼 존재하게 되는 자를 또 만나게 될 겁니다피를 마시는 새에서나무와 나무가 된 레콘의 형태로.


3. 제가 타자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은 폴라리스 랩소디이긴 하지만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피를 마시는 새인 것 같습니다흥미롭다 함은 말할 꺼리가 많다는 겁니다피를 마시는 새를 여러 번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이 소설은 약간 독특한 형태의 SF가 아닌가 합니다저는 SF라곤 평생 거의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제 생각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중세에서 근대의 과도기 정도를 배경으로 한그렇지만 매우 독특한 형태의 과학이 발달한 세계를 다룬 소설이요정치적으로는 봉건제와 중앙집권제의 사이경제적으로는 실물경제와 화폐경제의 사이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아요여기에 이미 전작부터 다져왔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는데 큰 무리를 일으키지 않는 몇 가지 소재들이 어느 정도는 현실성 있음직해 보이는 과학기술의 역할을 하는 거죠. (원자폭탄에 가까운 위력의 무기인 하늘치라거나전술핵무기쯤 되는 레콘 군인이라거나전화기와 같은 역할의 뱀부리미라든가삽시간에 지형지물을 변화시키는 하늘치의 환상건물과 레콘-건축기계도 그렇고, A.I.라고 해도 무방할 환상벽 등...) 그런데 여기에 도로를 끼얹으니 갑자기 오버 테크놀로지적인 느낌이 확 나더라구요피를 마시는 새의 유료도로는 마치 근대 과학문명에서의 철도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14세기 근방의 역사에 몇 가지 기묘하게 발달한 과학기술거기에 철도겉모양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스팀펑크 같지 않나요?


그런데 이것이 제게 판타지 느낌이 아니라 SF처럼 받아들여지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전작에서 등장하는 신화적인 소재들을 모두 쳐내버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신의 정체(停滯)에 의한 세계의 정체신의 권능의 직접적인 현현(화신에 의해서든수호자에 의해서든케이건에 의해서든유해의 폭포에 의해서든... 신은 아니지만 비슷한 정도로 형이상학적인 용인과 용의 능력도 이 분류에 넣을 수 있겠네요), 신명이나 나늬별철도깨비불 같은 신의 선물이러한 소재들은 사람의 역사(役事)가 아닌 신들의 역사입니다그래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사람의 역사(歷史)라기보다는 신화(神話)에 더 가까운 느낌을 줍니다신화란 무엇인가신화는 믿어야 하는 이야기하나의 현상에 대한 실제적인 원인이 숨겨져서그것을 제 3의 것으로 대신 설명하는그래서 비워지게 되는 연결점을 신앙으로 설득하는 독특한 말하기 방식입니다(바르트현대의 신화, p.275). 눈물을 마시는 새가 플롯의 이음새가 헐거워서 독자들에게 작품의 세계관을 믿도록 강요하는 소설이라는 말은 아닙니다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신이나 신의 권능신의 선물용 등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체들이고매우 정교하게 설정되어서 작품의 세계관에 완벽히 녹아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에피그라프의 차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작품은 이야기의 강조점이 매우 다르죠눈물을 마시는 새가 용과 왕국과 삶의 투쟁이 잊혀진 시대에서 그들의 부활 과정이 그려진 작품이라면피를 마시는 새는 (제국에 의해아니면 그리미 마케로우에 의해?) 온 세계가심지어는 꿈(무의식의 대표주자라는!)마저도 남김없이 규정되고 정의된 시대에서 그것으로부터의 탈주를 그리는 작품입니다아무래도 전작에 비해 형이상학적인 소재가 줄어들고 정치적인 주제가 늘어날 수밖에 없죠(규정과 정의는 신화나 예술보다는 법과 정치의 방식에 가까우니까요). 그래서 피를 마시는 새는 전작에서 등장하여 이야기에 박진감을 더해줬던 형이상학적 소재들(네 종족의 화신들잊혀진 종족신의 권능나늬용인용 등)을 포기합니다이들은 그 존재 자체가 독특할 수밖에 없는 소재들이고그래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러한 독특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풀어내는 작품입니다피를 마시는 새는 그와 달리 법과도덕과정치와권력으로 사람들을 일반화시키는 세계에서 독특성을 이끌어내려고 시도하는 작품입니다우리를 규정과 정의라는 구조화의 감옥으로 우리를 옭아매는 일반성에서부터 어떻게 독특성을 발명해낼 것인가나늬는 찾을 수 없고신과의 접촉을 가능케 하는 나가의 육체가 포기되며레콘의 무기가 대량생산되거나 박살나고반쪽짜리 도깨비불이 나타나고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시시한 이야기들에 매몰되지 않고 시시하지 않음을바보 같은 웃음을짧은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을 이끌어낼 것인가그러므로 피를 마시는 새에서 나늬가 누구인지종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3명의 레콘이 누구인지, 1만 6천 년 후에 얻게 될 네 종족의 완전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오히려 시시한 독해이리라 생각합니다그런 건 이미 규정된혹은 전작에 의해 신화화된 것이죠중요한 것은 어떤 행동이 나늬와 같은 효과를 발생시키는지어떤 판단이 종족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창조적인 판단인지우리가 현재적으로 달성하고 있는 완전성이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증대시키는지를 탐색하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피를 마시는 새는 (모든 위대한 제자들이 스승에게 그러하듯자신의 선구자인 눈물을 마시는 새를 계승하면서도 극복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작품이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와 그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두 작품의 주제두 작품을 관통하는 철학은 여전히 스피노자적으로 보입니다.


4. 완전성이란 무엇인가스피노자는 이 완전성에 대해 매우 독특한 정의를 내립니다모든 개체는 신이 그렇게 변용된 한에서의 결과이며그것이 그렇게 변용된 까닭은 (앞서 언급했듯이다른 원인과 작용이 그렇게 변용되도록 결정했기 때문이고그 다른 원인과 작용은 또 다른 원인과 작용이... 이렇게 무한히 나아갑니다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한 사건에 대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즉 우리가 사건의 원인에 대해 적실한 관념을 가지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한 개체는 일정한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것입니다(1부 정리 36 증명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신의 본성이나 본질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만물의 원인인 신의 능력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한 개체가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것결과를 생산한다는 것은 신이 그렇게 변용된 한에서 자신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모든 개체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그 완전성의 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죠우리가 수동적인 경우우리는 자신의 신체에 일어난 사건의 적실한 원인을 인식하지 못 한다 → 그 사건의 원인을 (우리 신체의 능력을 배재한 채외부 개체의 능력만으로 인식한다 → 우리 신체가 가진 능력을 최소한으로밖에 인식하지 못 한다 →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을 최소한도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최소한의 완전성만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반대로 우리가 더욱 더 능동적일수록 반대의 순서를 거쳐 더욱 큰 완전성을 가지게 되며자신의 능력을 더 많이 발휘할 수 있겠죠.


결국 한 사건에 대해 우리가 능동적이면 능동적일수록 우리는 자신이 가진 능력(즉 본질)을 증대 혹은 촉진시키게 됩니다스피노자는 이러한 증대되거나 촉진되는 방향의 신체적 활동능력혹은 자신의 사유능력의 이행을 기쁨이라고 정의합니다반대로 활동능력과 사유능력의 감소와 방해로의 이행을 슬픔이라고 하죠이성과 감성의 이러한 조합이 꽤나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나요사건에 대한 인식의 적실함/부적실함이 그 사람의 본질의 증대/감소로 이어지며이 능력의 변화 추이를 기쁨/슬픔으로 정의하는 일련의 과정이 제게는 정말 절묘하게 느껴집니다인간은 자신의 신체에 다른 것이 접촉할 때에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2부 정리 19. 인간 정신은 오직 신체가 받는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인간 신체 자체를 인식하며 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 이렇게 인식된 사건은 자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접촉한 다른 것에 대한 관념도 섞여있기 때문에(2부 정리 16. 인간의 신체가 외부의 물체에서 자극받는 방식의 모든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동시에 외부의 물체의 본성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신체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3부 정리 2. 주석실제로 지금까지 아무도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무도 신체의 구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아직 미지의 외부 대상과 접촉함으로써만 우리의 신체가그리고 그것과 평행한 우리의 정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고미지의 대상과 접촉함으로써만 (우리의 신체에 새로운 자극을 가함으로써우리의 신체와 정신이 가진 그때까진 알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이것이 바로 신체적 활동능력과 사유능력의 증대이며 이것은 곧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합니다우리는 케이건 드라카가 왜 새로운 종족인 나가를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줌으로써 우리의 능력을 발견해주고 증대시켜주는 대상기쁨을 가져다주는 대상에 대한 사랑은 매우 스피노자적인 사랑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우리의 신체/사유에서 새로움을 개발할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타자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랑예술은 당연히 이러한 맥락에 속해 있습니다쉬끌로프스끼는 예술이란 대상의 생성을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며이미 생성된 것은 예술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고 했다죠이제까지 몸을 움직여왔던 방식외부대상과 접촉했던 방식사유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아내는 것이것이 바로 시시하지 않은의미를 발생시키는기존의 시각에선 바보같아 보이지만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피를 마시는 새에서 이러한 스피노자적인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이 제시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이 글에선 두 가지 정도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죠.


이전부터 타자는 챕터의 제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장난을 친 것으로 악명이 높았죠. (드래곤 라자의 복수의 검은 손길이라거나...) 피를 마시는 새도 얼핏 보면 타자가 이번에도 장난끼가 발동했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불씨’, ‘/바람’, ‘태도’, ‘~는 것과 ~는 것이라는 4가지 소재를 가지고 이리저리 굴려보며 챕터 제목을 짓고 있습니다어떤 제목은 그 챕터의 내용과 매우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 같고어떤 것은 그렇지 않기도 하죠그리고 마지막 챕터는 장생입니다마치 이러한 말놀음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을 주죠이러한 챕터의 명명은 아마도 사무엘 베케트의 과자 조합과 비슷한 소진시키기의 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이미 머피Murphy에는 다섯 개의 작은 과자들의 조합에 몰두한 주인공이 등장하는데이때 조합은 모든 선호의 순서를 물리침으로써 총 120가지 방식의 치환 가능성을 얻어냈기에 가능했다. “머피는 이러한 관점들에 넋을 잃고 감탄하며 풀밭 위 과자 더미 옆에 털썩 배를 깔고 누웠다별들처럼 과자 하나하나는 서로 다르게 빛나며또한 이것보다 저것즉 어느 것 하나를 선호하지 않을 때 비로소 각각의 진가를 알 수 있게 되리라고별들에 대해서만큼 공평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들뢰즈소진된 인간, p.27)

새로움의 발견은 낙타처럼 이전의 사유를 짊어지고 가선 안 되고그렇다고 사자처럼 단지 기존의 사유를 공격하기만 해서도 안 되며어린아이처럼 놀이를 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왜 조합에 있어 모든 선호의 순서를 물리쳐야 하는가선호는 목적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를 하기엔 이것이 낫다.’ 이미 마련된 기준에 따른 선호와 배제의 방법은 그 기준 때문에 새로울 수 없습니다그러므로 모든 조합을 소진시키고 나서야 우리는 그 지점을 시작으로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을 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닌방법 자체를 즐기는 니체의 어린아이 같은 놀이를 통한 소진이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던 점으로부터의 사유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목적의 거부에서 이미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지만타자가 제시하는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제이어 솔한입니다실패를 추구하나 항상 그 지점에서 에너지를 얻는 인간목적의 달성은 기존의 사유를 단순히 만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그러나 실패는 목적의 관점에서는 알지 못했던 다른 사유와 행동을 가져오고그를 통해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우리의 능력을 증대시켜주는 계기이며그러므로 기쁨을 일으키는 사건입니다실패와 새로움그리고 기쁨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 칸트의 숭고미에 대한 고찰을 언급하는 것이 좋은 예시가 될 수도 있겠네요.

숭고의 느낌은 무형 혹은 기형(광대함 또는 강력함)에 직면할 때 체험된다... 확실히 상상력은 포착(부분들의 연속적 포착)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그러나 후속 부분에 도달함에 따라 선행하는 부분들을 재생해야 할 경우 상상력은 동시적 총괄의 최대를 가진다광대함에 직면할 경우 상상력은 이 최대의 불충분함을 체험하고는 이 한계를 확장하려 하나 다시 자기 자신 속으로 위축된다.” 언뜻 보아 우리의 상상력을 무력하게 하는 이 광대함은 자연적 대상즉 감성적 자연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사실 우리로 하여금 감성적 자연의 광대함을 하나의 전체로 통일시키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이성이다... 이처럼 우리는 숭고를 통해 상상력과 이성 사이의 직접적인 주관적 관계와 만나게 된다그러나 이 관계는 우선 일치보다는 오히려 불일치즉 이성의 요구와 상상력의 힘 사이에서 체험하는 모순이다이 때문에 상상력은 자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고 숭고의 느낌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처럼 생각된다그러나 그 불일치의 심층에는 일치가 있다즉 고통은 즐거움을 가능케 한다상상력이 모든 면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통해 자기의 한계에 직면할 때 상상력은 자기 고유의 한계를 넘어버린다.(들뢰즈칸트의 비판철학, pp. 98~99)


5. 이제 할 말은 어느 정도 끝난 것 같습니다이영도님의 새로운 작품을 나름대로 기념 삼아 쓴 글인데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네요언제나 글을 쓰기 전엔 마구 솟아나던 생각이 막상 키보드를 앞에 놓으면 쪼그라들고 원심력을 받는 것처럼 중심에서 튕겨나가는 것 같습니다결국 이렇게 두서없는 글이 되었습니다그러니 이 글은 파편적인 모티브들이라고 생각하시고 또 활용하셨으면 더 좋겠습니다제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이 글을 통해 스피노자니체들뢰즈를 새로 혹은 다시 읽는 계기를 마련하셨으면 좋겠네요.

by 데오늬달비 | 2018/05/23 18:12 | books | 트랙백 | 덧글(0)

'피를 마시는 새'를 분석해 보자

0. S, N, F, K, D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 희망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자는 그 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생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로운 자가 사기꾼이라는 것.

우리의 현명함을 포기할 수 없기에 전자를 선택할 수도 없고 우리의 멍청함을 강조할 수 없기에 후자를 선택할 수도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둘 모두를 끌어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전제는 정확하며, 사기꾼은 사기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서문.(피를 마시는 새)

 

D: 당신이 그 부분을 인용하면서 다음 글을 예고한 지도 1년 반이 넘었군요. 이제 와서 다시 그 부분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이 당신이 이전 글의 말미에서나 희미하게 드러냈던 문제의식을 드디어 풀어내겠다는 결심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 , 시작부터 저를 당황하게 만드는군요.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이미 1년 반쯤 전에 열 장은 족히 되는 글을 썼고, 그 때엔 나름대로 제 글에 만족했습니다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글에서 딱히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곳은 예비적 챕터라고 쓴, 전체 분량에 대비해서 따져보면 10분의 1도 안 되는 그 짧은 부분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 때에도 제 글이 논리적으로 불안한 분석이 아닐까 하는 느낌은 희미하게나마 있었고, 그래서 방어적인 태도로 사족을 덧붙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부분을 어떻게 현재 저를 사로잡고 있는 관점으로 표현해야 할지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을 쓸 때도 다음 글은 우리의 현명함을... 로 새로 덧붙여진 부분을 인용하면서 시작해야지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사기꾼이라는 것으로 끝나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었죠. 그런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의 저는 1년 반 전의 저와는 다르게 당신과, 당신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으니까요.

 

D: 그렇군요. 당신은 그 당시에 막 S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던 때였지요. 그래서 그런 문제의식을 당신 말마따나 희미하게나마가질 수 있었겠죠. 그럼 S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까?

 

: 아니오, 당신과 S. 혹은 N, F, K 등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익숙지 않은 개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그런 경우였으니까요.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잘 모르겠군요. 이미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곳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N과의 유사성을 이미 누군가가 인터넷으로 지적한 적이 있지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언급한 인용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당신이 어디선가 말한 대로 어느 쪽으로 해서든 사람들은 들어가겠지만, 어떤 쪽도 다른 쪽보다 낫지 않으며, 어떤 입구도 아무런 특권을 가지지 않으니까요. (물론 이런 의미로 당신이 이 말을 사용하진 않았겠지만) 그러니 자연스러운 방향은 기왕 시작한 곳으로부터 뻗어나가는 것이겠죠. 글의 진행은 당신이 화제를 던지면 제가 그것을 분석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이 글에서 나타난 당신의 생각이 세밀하지 못하고 부정확하더라도 저의 잘못으로 쉽게 돌릴 수 있을 테니까요. 역시 저로선 남의 이름을 빌려서 생각을 전개할 때엔 조심하고 싶네요.

 

1. 지속durée

 

D: 좋습니다. 우선 우리의 인용문이 당신의 이전 글, 그 중에서도 모순은 완전성을 담보한다. 신이 실재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세계관에서 완전성은 아마도 가능한 개념일 것이다라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은 명백합니다. 당신은 완전성엔 궁극적 목적이 있고, 그것이 바로 모순의 지양Aufheben’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용문은 삶이 지양된다면 삶이 이미 삶이 아니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연 모순은 지양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지양된다면, 그 결과는 지양되기 이전의 삶이 가진 의미를 보존하면서 지양될 수 있나요?

 

: 저의 가장 큰 오해는 삶을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진행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인용문의 전제도 역시 그러합니다. 삶을 원인으로, 완전성을 결과로 이해할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목적론적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들이 현재를 부정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주체는 입니다. 그런데 이 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소리 로베자와의 대화에서 파지트 대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가 지속적이라고 파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의 개념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라는 주체를 형성할 땐 항상 조건이 따라옵니다. 내가 나와 내가 아님을 신체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 때.

그러나 파지트 대선은 그 사실을 부정합니다. 우리의 신체는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경계지우는 방식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신체는 끊임없이 외부의 무언가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부를 생각할 때, 이 외부는 신체로부터의 외부가 아닌, 주체 혹은 의식으로부터의 외부입니다. 내 신체와 내 신체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은 단지 나의 의식이며, 내 의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체는 끊임없이 이것과 결합했다가 다른 것과 결합하는 식으로 존재합니다. 신체는 음식과 결합하기도 하고, , 풀잎, 버섯, 토끼, 돼지, 지렁이와 같은 것과 결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 봅시다. 우리의 의식이 라고 경계짓던 신체조차 사실은 그 내부에서 끊임없는 결합의 연쇄에 놓여 있습니다. 손가락이 잘린다고 하더라도 신체가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체의 부분이 손가락이 없는 형태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몸속에 인공심장을 이식할 때, 신체는 인공심장이 있는 형태로 결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이 임의적으로 세운 경계는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신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지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합적으로 존재하고 결합의 연쇄로써 유지됩니다. 이 부분을 S의 말로 표현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각 부분이 매우 복잡한, 본성이 다른 매우 많은 개체로 조직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는 개체 중에서 어떤 것은 유동적이고, 어떤 것은 연약하며, 마지막으로 어떤 것은 단단하다. 인간의 신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대단히 많은 다른 물체를 필요로 하며, 이들 물체에 의하여 계속해서 재생된다.(S)

 

이 말을 이제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여 정리하자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신체는 끊임없이 결합하면서 생성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저는 분해나 해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분해나 해체는 이전의 결합형태가 지속될 수도 있다는 어감을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분해나 해체를 단지 이전의 결합과의 차이만을 나타내고자 할 때엔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해나 해체라는 단어가 하나의 관점’, 예를 들면 나의 관점 같은 것을 은밀히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전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분해나 해체는 없습니다. 단지 이것과 결합했다가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나 다른 것도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계속해서 서로 차이나는 부분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S외연적 부분들의 양적 무한이라고 말합니다. N이라면 찢겨진 디오니소스의 사지들 혹은 조각들이라고 말하죠. 당신이라면 아마 미분적인différentiel 요소들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D: 그렇다고 하죠. 그러나 완전히 그렇다고 하기엔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부분들이 양적으로 경계 없이 결합한다면, 결국 양적으로 하나의 전체로서의 신체corps, 시간적으로 매순간동시적으로 생성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만약 부분들이 결합하고 그럼으로써 생성되고 있다면,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신체로서 무한한 부분들이 무한히 생성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신이 앞서 말한 과정으로서의 삶, 주체로서의 나를 어떤 방식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 말해주겠습니까?

 

: 저는 이미 앞의 제 말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던졌습니다. , 제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나의 신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기한대로, ‘하나의 전체로서의, 매순간 동시적으로 생성되는 것으로서의 신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우리가 신체를 의식적으로구분할 때, 그 신체는 알고 보면 무한히 차이나는 부분들로 나뉘어져 있기도 하고, ‘동시에그 부분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부분들의 결합을 공시적으로(즉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연결한다면, 그것이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는 무한한 부분들의 무한한 생성으로 파악되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존재입니다. 이것을 당신의 말로 표현하면 존재의 일의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신체에 대한 우리의 모든 구분은 인위적이고 허구적입니다. 그것은 마치 누구의 것도 아닌 너른 땅에 선을 긋고는 이제부터 이 선 안이 나의 땅이다라고 말하고 선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선의 이쪽과 저쪽은 실제로는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테마가 타자(打者)의 단편소설인 골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공간적으로 신체가 무한한 부분들의 결합으로서의 전체라고 한다면, 시간적으로는 어떻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어떤 힘이 부분들로 하여금 운동하도록, 다른 부분들과 결합하도록 하였습니까? 우리가 신체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경우, 운동은 단 하나의 계기만으로도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계기란, 바로 존재할 것입니다. 운동하기 위해선 존재가 실존하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이 열리고, 존재가 실존하기 시작하면, 존재는 그 때부터 운동하기 시작합니다. 멈춰있음을 비-운동상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멈춰있음은 특이한 운동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신체, 혹은 존재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는 이들, L, S, N 등은 시간이 열린 시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대에서 이 문제는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겠죠)

그러나 결합의 원리는 중요합니다. 무한한 부분들이 어떤 방식으로결합하는가? 이제 우리가 오랫동안 묵혀온 문제를 언급해야 할 때가 온 것일까요? , 우리는 이미 개개의영혼이 불가능함을 압니다. ‘라는 주체 혹은 의식을 형성하는 조건은 나의 신체가 나와는 배타적으로 나의 영혼에 포섭되고, 나의 영혼만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실존함입니다. 그러나 신체는 전체이면서 동시에무한합니다. 이런 가정이 가능할까요? 전체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가 있지 않을까? 전체가 그가 의식하는 대로 결합하도록 구성하고, 전체이면서 무한한 부분들을 하나의 목적을 향해 운동시키는 존재가 있지 않을까? ‘는 그런 존재로부터 나라는 주체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결합하도록 마련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로써 가장 근본적인 바닥에 도달했습니다. 너무나도 자주 말해졌기에 식상하기까지 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신은 있는가?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할까요? 우리는 신이 있다면 전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을 이미 제시했습니다. 신이 신체의 결합의 원리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두 가지 모습의 신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유도합니다. 신체와 평행하게 사유하는 신, 혹은 신체보다 더 크게 사유하는 신. (신이 신체보다 작은 사유라면, 그 결합의 원리가 신체의 부분에만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신이 신체보다 사유를 더 크게 가진다는 것은 불합리해 보입니다. 그것은 신이 자신이 사유하는 것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이 사유만으로 혹은 신체의 부분만을 가진다고 정의된다면, 그것은 신체에 대해 유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판단은 신의 절대적인 무한함을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도달합니다.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고(자유라는 심리학적 환상), 목적을 위하여 행동하는(목적성이라는 신학적 환상)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신이 신체와 동등하게 즉 평행하게 사유할 때에야 신은 신체와 사유 모두에서 무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이 전체로서의 신체의 결합원리로서 사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합리성을 말할 수 있고, 신에게 정당한 그의 자리(즉 절대적 무한으로서의 신)를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은 우리에게 목적 없이 결합하고, 목적 없이 사유하라고 말하는 신입니다. 결국 우리는 N이 말하는 존재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의 존재입니다.

제가 앞서 조악한 표현으로 늘어놓은 주장은 S의 것입니다. 초월이 아닌 내재로서의 신을 가장 말한 S는 생성 자체에 대해선 외부의 영향을 통한 결합으로 파악했고, 그래서 NS가 외부의 영향이 없다면 결합이 지속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따분하고 정적이라고 주장하면서(그것이 맞는 말이든 N의 오해이든), 결합 자체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시합니다. N의 주장은 이겁니다. 만약 신체가 무한히 많은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각각의 부분이 무한히 결합하고 있다면, 그 결합은 힘들force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에 내가 권력의지la volonté de puissance라고 부를 하나의 내적인interne 의욕을 결부시켜야만 한다.’ 우리가 운동을 말할 때, 그것은 힘들이 서로 관계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의 힘만이 있다는 것은, 생성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생성이 무한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운동이 어떤 힘들과 다른 힘들과의 양적인 차이에 의해 발생한 결과라고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정지는 어떤 힘들과 다른 힘들이 평형을 이루기 때문에 나타난 특별한 운동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힘들 간에 양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 이것은 힘들이 결합할 때 명령하는 힘복종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결과로서의 힘의 결합, 복종하는 힘이 명령하는 힘의 가면을 쓴 모습입니다. (그래서 정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지 아래에서 실제로 계속되고 있는 힘들의 투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힘들이 결합하도록 작동하게 하는 요소, 이것을 N권력의지라고 말하죠. 그래서 N은 힘과 권력의지를 힘은 할 수 있는 것ce qui peut’으로, ‘권력의지는 원하는 것ce qui veut’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권력의지를 힘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앞서 S의 말에서도 끊임없이 상기시켜 드렸듯이, 사유/의지는 신체/힘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고, 오히려 두 요소는 평행합니다. 그래서 N권력의지가, 그것이 조건 짓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지 않고, 조건 지어진 것과 더불어 변신하며, 그것이 결정하는 것과 더불어 각각의 경우에 있어 스스로를 결정하는 본질적으로 조형적인 원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힘과 그리고 힘들과 함께 변신하는 목적 없는 의지이며, 특별한 시공간적 배경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공시적으로는 한꺼번에 즉 서로 차이나는 부분들의 전체, 그리고 통시적으로는 끊임없이 지나가고 또 도래하는 순간 즉 되돌아오는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N이 말하는 영원회귀이고, 당신이 말하는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입니다. 주사위 던지기로, 혹은 타자의 소설에서 윷놀이로 예시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주사위/계속해서던지는 것. 대지와 하늘이 모두 참여하는 천지척사는 영원회귀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신들과 더불어 대지라는 신성한 탁자 위에서 주사위 놀이를 했을 때, 대지가 요동하고 갈라지고, 화염의 강을 뱉어냈다면, 그 이유는 대지가 창조적인 새로운 말들과 신성한 주사위 소리에 의해서 흔들리는 신성한 탁자라는 점에서이다.(N)

 

, 내 위에 있는 하늘, 순수하고 고귀한 하늘! 지금은 내게 있어서 바로 너의 순수성은 영원한 거미도, 이성의 거미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신성한 우연들이 춤추는 마룻바닥이며, 너는 주사위들과 놀이하는 신들을 위한 신성한 탁자니라……(N)

 

대지를 윷판 삼아 하늘로 윷가락을 던진다. 네 개의 윷가락은 날고, 까불거리고, 부딪치고, 구른다. , , , , 모의 다섯 조합 중 하나가 나올 터인데, 그것은 어느 순간에 정해지는가? 물론 하늘로 던져진 순간이다. 그 순간 다섯 조합은 모두 긍정된다. 대지에 떨어졌을 때 나온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미 긍정된 우연 중 하나다. 그리고 윷놀이는 계속된다. - 작자 미상 <천지척사>(눈물을 마시는 새)

 

우리가 부분들 간의 목적 없는 결합을 인정하기에, 우연을 긍정하기 때문에그것이 전체의/순간의 필연이 됨을 긍정하고, 다시 한 번 그것으로부터 우연한 결합이 생성될 수 있음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차이의 향유la jouissance de la différence’, 영원회귀, 신체와 사유의 평행론, 양적 차이로서의 힘과 조형적 원리로서의 권력의지.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신, 주체, 인간이 임의대로 그어놓은 모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모든 개념들을 해체시키고, 그것을 순수한 생성의 사유 아래에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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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오늬달비 | 2013/11/09 05:16 | books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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