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다시 읽기

이 글은 원래 단편적인 분석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으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금은 수고스럽더라도 중심을 잡는 것이 가독성의 측면에서 낫다고 판단했다. 한 달이 넘는 긴 기간을 들여 글을 마친 지금 시점에 보면, 원래 의도했던 가독성은 거의 내다 버린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너무 띄엄띄엄 글을 썼더니 필자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산만해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퇴고 작업은 따로 하지 않으려 한다. 중언부언하더라도 너그럽게 양해를 바란다.

1. 개밥바라기 – 사물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개밥바라기는 도깨비 무사장의 무기이자, 바우 머리돌 성주의 화훼재배 중 유일한 성공작이고, 치천제의 자매인 용이기도 하다. 개밥바라기라는 이름은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영웅왕의 검 바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타자가 무사장의 검명을 이렇게 지은 것은 분명 전작에 대한 오마주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또 다른 오마주가 담겨있기도 하리라.

개밥바라기의 ‘바라기’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이 별이 뜰 때 즈음이 개밥그릇에 저녁을 채워 넣어야 할 시간이었다는 데에서 이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작품 내에서도 ‘밤을 부르는 별의 이름을 따’ 그리 불린다고 표현된다. 이 별의 또 다른 이름은 샛별로, ‘새’는 동녘을 의미하므로 동쪽에서 뜨는 별이라는 의미에서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 별은 금성이다. 금성은 저녁 즈음의 서쪽 하늘에 보일 때엔 개밥바라기로, 새벽녘 동쪽 하늘에 보일 때엔 샛별로 불린다. 같은 대상을 가짐에도 뜻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학자이자 분석철학의 정초자인 고틀로프 프레게는 바로 이 예시로 언어는 그 대상인 지시체와 표현방법인 뜻이라는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프레게와 이 작품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길래? 사실 샛별과 개밥바라기의 예시는 워낙 훌륭한 고찰이기 때문에, 분석철학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도 이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다. 그 중에는 (필자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이름이 익숙할) 들뢰즈도 있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에 있어 중심개념 중 하나인 ‘존재의 일의성(一義性)’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예가 (스피노자의 야곱/이스라엘과 더불어) 바로 프레게의 샛별/개밥바라기의 예시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일의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샛별과 개밥바라기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어느 지점에서부터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갈라지기 시작하는가?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원래’ 다른 것인가? 하지만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동일한 대상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그 자체로 다르다고 말하려면, 그 차이는 금성이라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에서부터 유래해야 할 것이다. 즉, 금성의 바깥에 샛별의 샛별다움이 ‘있고’, 개밥바라기의 개밥바라기다움이 ‘있으며’, 금성은 새벽과 저녁에 각각 샛별과 개밥바라기의 ‘다움’을 나누어받아야(分有) 할 것이다. 금성의 외부에 ‘있는’ 샛별/개밥바라기는, 현실의 바깥으로부터 때에 맞춰 실존하는 금성에 자신의 ‘다움’을 부여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새벽과 저녁이라는 한정된 시간에만 나타나는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에 비해 항상적(恒常的)이다. 반대로 금성의 몸을 빌어 새벽과 저녁에 잠시 나타나는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는, 그들에게 ‘다움’을 나누어주는 현실 너머의 샛별/개밥바라기보다 일시적이다. 그러나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와 현실 너머의 샛별/개밥바라기는 공히 ‘있다.’ 바로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한다. ‘있다’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두 차원의 샛별/개밥바라기에게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단어의 뜻이 서로 다르게 사용됨을 알게 된다. 현실 너머에서 자신의 ‘다움’을 나누어주는 샛별/개밥바라기는 항상적이고, 그래서 현실의 그것에 비해 더 ‘탁월하게’ 있다. 반면 그 ‘다움’을 나누어받는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는 일시적이고 간헐적으로 있기 때문에, 현실 너머의 그것에 비해 더 ‘열등하게’ 있다. 이렇게 ‘있음’이 어떤 경우에는 ‘탁월하게’라는 뜻을 함축하고 다른 경우에는 ‘열등하게’라는 뜻을 함축할 때, 우리는 이 ‘있음’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가 다의적(多義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이 있는가? 우리는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 사이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다. 우선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가리키는 방법(mode)의 다름으로부터 차이가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있다고 말할 때, 이 때의 ‘있음’은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샛별이 있든, 개밥바라기가 있든, 어쨌든 그것은 동일한 의미에서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새벽녘 동쪽 하늘에 떴을 때엔 샛별의 방식으로, 저녘 즈음 서쪽 하늘에 떴을 땐 개밥바라기의 방식으로 있을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샛별과 개밥바라기를 구별할 때, 우리는 현실의 샛별/개밥바라기 외의 다른 것을 상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따라서 ‘있다’라는 말에는 다른 함축된 의미가 없고, 단지 ‘있다’라는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가 일의적(一義的)”이라고 말한다.

개밥바라기는 도깨비 무사장의 무기이자, 바우 성주의 화훼재배 중 유일한 성공작이고, 치천제의 자매인 용이기도 하다. 「피를 마시는 새」를 유심히 본 독자들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여러 이름을 나열하는, 이러한 병렬적 표현방법을 작품에서 종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엘시 에더리, 신의 아들, 하지만 신에게 죄를 저지른 자가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피를 마시는 새」, 41장. 이후 「피를 마시는 새」를 인용할 경우 장만 표시하도록 하겠다)”나 “아라짓 제국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화이며 발케네의 통치자, 자유무역당의 후원자, 용감한 도둑들의 친구, 그리고 뿔관의 주인(16장)”과 같은 곳에서 말이다. 샛별, 개밥바라기의 예시가 가리키는 바를 고려하면, 이러한 표현법에 특정한 의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이 너무 빠르게 진행된 것은 아닐까? 겨우 개밥바라기라는 단어 하나에 과민반응하여 성급하게 텍스트 바깥의 개념을 끌어온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필자는 이 두 개념, 즉 존재의 다의성과 일의성의 부딪침이야말로 이 작품을 이해함에 있어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러기에 이 글에선 이 개념들이 드러나는 곳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먼저 핵심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결론을 반복하여 서술하게 만드는 수고를 덜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심장탑과 바둑판과 도로 – 존재론적 다의성의 세계와 일의성의 세계

존재가 다의적인가 혹은 일의적인가라는 질문이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가? 그것은 곧 본질과 실존의 문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본질이 먼저인가, 아니면 실존이 먼저인가? 이 화두는 아실(혹은 락토 빌파)의 입을 통해 작품에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실존이라는 개념이 당신들에게는 발견된 것일지 몰라도 레콘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본질에 대한 낡은 수수께끼를 레콘에게 적용하지 마세요. 만물이 자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레콘에겐 지극히 간단합니다. 거기서 평가가 이루어지고 가치가 발생합니다. 실존에 끼치는 영향에 따라 평가하는 것입니다. 세계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는 나의 실존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도 세계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계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에 맞아 죽게 된 사람이라면 입장이 다르겠지요. 이렇듯 실존만이 평가를 하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존이 하는 일이라곤 사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9장. 이후 모든 인용문 내의 볼드체는 전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사용한 것임을 밝힌다)

앞에서 언급한 샛별/개밥바라기의 예를 다시 살펴보자.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각각 샛별다움/개밥바라기다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별된다면, 현실의 바깥에서 그 ‘다움’을 나누어주는 탁월한 샛별/개밥바라기의 본질이 있어야 한다. 아니, 차라리 본질과 이분법적 세계(차안/피안), 위계질서(열등함-탁월함)은 서로가 필수불가결한 하나의 강력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독교로 대표되는) 많은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하늘-땅, 가벼움-무거움, 선-악, 순수-혼탁함의 모델은 본질/이분법적 세계/위계질서의 구조에 대한 관습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비유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발견의 과정이다: 샛별의 본질이 있다 -> 금성에게 샛별의 ‘샛별다움’을 나누어준다 -> 관찰자는, 비록 샛별 그 자체인 본질에서만큼 뚜렷하진 않지만, 금성 속에서 ‘샛별다움’을 발견한다. 따라서 다의적 세계는 실제 샛별보다 샛별의 본질이 먼저 있는 선험적 세계, 즉 유심론(唯心論)의 세계이다.

하지만 실존이 본질에 앞설 경우, 구별은 발견행위가 아니다. 최초의 단계에 금성에서 발견되는 것은 ‘있다’는 사실 뿐이며, 이것이 아실이 말한 “실존이 하는 일 전부”이다. ‘금성이 있다’라는 최초의 지점에서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별은 ‘우선 있고 난 후’에 진행되는 후천적인 행위이고, 따라서 발명, 창조, 혹은 생산의 행위가 된다. 그리고 가치와 평가는 개념을 생산시키는 원리로서 작동한다. 우리는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구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 구별을 표현할 만한 개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새벽에 동쪽에서 보이는 금성과, 저녁에 서쪽에서 보이는 금성은, 우리가 구별해서 생각해야만 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고 나서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생산된다. 따라서 일의적 세계는 ‘있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그러모아 개념을 만들어내는 후험적 세계, 즉 유물론(唯物論)의 세계이다.

한편으로, 가치들은 원리로서 나타나거나 주어진다: 그리고 평가는 가치들을 전제하는데, 이 가치들을 기반으로 현상이 평가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좀 더 심층에서, 가치들이야말로 평가들, 즉 “평가의 관점”을 전제로 하는데, 가치들 자신의 가치는 바로 이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비판의 문제는 가치들의 가치의 문제이자, 그 가치들의 가치를 발생시키는 평가의 문제이며, 그러므로 그것들의 창조의 문제이다. (「니체와 철학」, 질 들뢰즈, 1장)

이를 통해 파악된 다의성/본질과 일의성/실존의 두 세계를 공간적으로 이미지화 하는 것이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선 다의적 세계의 양상을 살펴보자. 이곳에선 본질들의 세계가 중심이 된다. 이 본질의 세계는 수직적인 높이를 가진다(위계질서). 실존하는 것들은 이 본질의 세계를 중심으로 모여있으며, 여기에서부터 본질들을 나누어받는다. 그리고 서로 다른 본질을 나누어받은 각 존재자들은 서로 공통점 없이 불연속적으로 구별된다. 예를 들어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서로 다른 본질을 나누어받아 구별되므로, 샛별이 샛별이기 위해 혹은 개밥바라기가 개밥바라기이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의자가 없다고 해서 책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또한 일차적이고 탁월한 본질에 비해 존재자는 이차적이고 열등하므로, 본질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현실의 존재자들은 본질의 세계로부터 그들의 정체성을 부여받기 때문에, 결코 본질의 영향권 밖으로 뛰쳐나갈 수 없으며, 그래서 본질이 한계 짓는 영토 이내에 배치되어야 한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보자.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 8장)

이 그림은 카프카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두 가지 세계의 이미지 중 하나이며, 바로 다의적 세계를 시각화한 지형도이다. 만약 이 모양새를 보고 나가들의 도시를 떠올린다면 더 접근하기 쉬우리라. 나가들의 심장, 즉 본질은 높은 심장탑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육체는 심장이 뛰는 한 쉽게 죽지 않고, 심지어 머리가 잘려도 심장으로부터 다시 생명을 나누어받을 수 있다. 그리고 각 존재자(그림에서의 블록)들이 불연속적인 것처럼, 나가들도 이성적이다(「피를 마시는 새」는 물론이고 전작인「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도, 나가는 공감적이지 못하고 가슴이 없으며 “피가 차가운” 생물이라고 언급된다. 「눈물을 마시는 새」, 5장).

그러나 존재가 일의적이라고 말할 때, 또는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피안의 세계를 가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존재론적으로 일의적인 세계는 높이가 없이 실존의 세계만이 넓게 펼쳐진 형태의 공간, 즉 평면의 공간이자 표면의 공간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존재자들은 일견 불연속적으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공히 금성에 기반을 둔 것처럼(혹은 책상과 의자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구별되는 존재자들은 ‘존재’라는 하나의 기반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이러한 공간을 들뢰즈는 다음의 지형도로 나타낸다.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 8장)

이 그림에 그려지진 않았지만 참고를 위해 덧붙이자면, 책의 본문에서 분리된 문들이 배치된 복도는 “무제한하게 연속되는 선”이라고 들뢰즈는 설명한다. 즉, 모든 존재자들(블록들)이 일견 (색칠된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모두는 같은 공간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모든 블록이 뻗어나오는 이 공간은 수직적이지도, 또 중심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이러한 블록은 한계 없이 수평적으로 무제한하게 반복되며 뻗어나간다. 앞의 경우와 달리 쉽게 알아채긴 힘들지만, 작품 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공간이 제시된다.

“바둑에 사용되는 돌은 두 가지죠. 흰 돌과 검은 돌.” … “아니오. 바둑에 사용되는 돌은 361개입니다. 패싸움이 많다면 더 늘어날 수도 있고.” (11장)

기사는 요석과 폐석을 말하지만 모든 돌은 그것을 놓은 기사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권리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돌은 똑같다. 361개의 개별적이고 완전히 평등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 반면에는 고저가 없다. (23장)

사람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바둑의 문외한들은 몇 년 전에 둔 바둑도 복기해 내는 기객의 재주에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바둑을 전혀 둘 줄 모르는 사람이 흑돌과 백돌을 번갈아 바둑판 아무 곳에나 내려놓은 다음 돌을 놓은 순서를 재현할 것을 요청하면 국수급의 기사라 하더라도 재현하지 못한다. 기사는 돌이 놓인 반면의 좌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돌들의 관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시각 전부에 해당하는 특징이다. (17장)

하지만 그 시점에서 사모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은 유료도로 당의 사람을 보는 관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모든 요소가 무시되고 있었다. 여행자의 품성과 지성과 감성 따위는 유료도로당에게 조금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여행자가 통행료를 지불하느냐 지불하지 않느냐의 이분법만이 존재했다.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일 수 있는 그 장면에서, 그러나 사모는 동시에 정반대의 의미도 발견했다. 여행자의 외모와 종족과 고향 같은, 어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람다움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들 또한 유료도로당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 "우리에게 여행자란 여행자 같이 생긴 자들이 아니오. 칠푼디. 여행자가 무엇인지 말해주겠소?" … "여행자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 유료도로당은 무엇인지 말해주겠소?" "우리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위해?"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마시는 새」, 5장)

반면은 평평하고 고저가 없다. 따라서 돌 하나하나에 각각 가치를 부여하는 수직적 높이가 없다. 그러므로 “권리상으로는” 모든 돌이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제이어의 발언에서처럼 각 돌이 구별되고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오직 같은 평면 위에 놓인 다른 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돌들은 361개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패싸움에 따라 “무제한적이고 연속적으로”) 더욱 늘어나기도 한다. 이와 연관하여 생각해보면, 유료도로당은 스스로 평면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행자들이 서로 연결될 공간을 마련하기만 할 뿐이며, 그 행위에만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바둑판 위의 돌이 되어 다른 돌 속에서 가치를 찾기보다, 바둑판 자체가 되어 그 위에 돌을 올려놓는 것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평면적인 도로에 최대한 가깝고자 하는 그들은 통행료의 유무라는, 매우 낮은 높이만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3. 먹고 싸기와 음식과 분변 사이 – 평면적인 존재와 불가피한 한계

그렇다면 「피를 마시는 새」는 그 두 세계 중 어느 쪽의 관점을 택하는가? 작품 내에는 이를 알아보기에 적절한 부분이 있다. 파지트 대선의 말을 들어보자.

"저희들이 하는 일이오? 바보가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 잊어버려야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때 음식이라고 불렸던 무엇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은 없어지지 않고 다른 것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 그런데 제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 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것들이 되지요. 만물은 이런 것이 되었다가 흩어져 저런 것이 되었다가 다시 모여서 그런 것이 되었다를 반복합니다. 파지트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사실 다른 무엇들이었고, 또 다른 무엇들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들과 구분되는 절대적인 파지트는 없습니다. 그리고 파지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리켜 무엇이다라고 말해도 그것은 다른 것들이었고 또 다른 것들이 될 겁니다. 저희들은 그것을 가리켜 비어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없으면서 있는 것입니다.” (29장)

상당히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이 말은 본질보다는 실존에 친근해 보인다. (니체가 그리스도를 “니힐리즘의 최고 단계까지 도달한 최후의 인간, 소멸하기를 바라는 인간인 부처”로, 그렇기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초인이 도래하기 직전의 인간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을 상기하자) 대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본질은 그것을 나누어 받는 자를 한계 짓는다. 그러므로 본질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몸은 피부라는 경계 내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원형 운동의 과정을 겪는다(앞서 본 첫 번째 그림에서 탑과 그것을 둘러싼 블록들을 떠올리라). 그러나 파지트 대선에게 있어 몸은 재생산보다는 끝없는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그것은 선적이고 비가역적인 편도(片道)운동이기도 하다(두 번째 그림에서 끝없는 복도를 떠올리라). 그러므로 파지트 대선의 노력은 절대적인 파지트가 있다는 가상, 본질이라는 가상을 잊고자 함이다.

여기에서 소리가 이의를 제기한다. 쉽게 변하기 마련인 육(肉)은 그렇다 치고, 영(靈)은 어떤가? 죽음 이후에도 신의 곁으로 가게 마련인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엔 파지트 대선 대신 사라말이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런데 음식을 분변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몇 가지 부산물들이 발생합니다. ... 어쨌든 저는 제 육체를 음식과 분변 사이에 위치시키는 노동을 통해 상당한 가외소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영의 음식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고백하십시오. … 당신도 죽을 수 있습니다. 불사는 그 개념도 모르는 자들의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불사는 불생입니다. 당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죽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를 보장할 수 있습니까? (18장)

즉, 영혼도 먹고 싸기라는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 지는 모르지만, 결국 죽게 된다. 사실 사라말의 말에 비춰보자면 영혼은 정신과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정신이 변화와 죽음의 과정을 겪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크게 반하지도 않는다. 사라말은 단지 신의 죽음을 통해 영혼이라는 단어에 깃든 (불멸의 색을 띄는) 아우라를 지워낸 것일 뿐이다. 타자의 이 일련의 작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들은 「폴라리스 랩소디」와 마찬가지로, 「피를 마시는 새」의 세계가 존재의 일의성에 기반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두 작품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가 일의성의 세계의 철학적 구조 자체를 세밀하게 그려내는 데 더 힘을 준 알레고리적 작품인 반면(이 점은 필자의 다른 글인 ‘「폴라리스 랩소디」 다시 읽기’에서 나름대로 풀어낸 바 있다), 후자는 일의성의 관점 하에 실존하는 세계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작의 주요한 문제의식은 관념적인 성향이 짙어 보이는 「폴라리스 랩소디」에 비해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그 현실적인 문제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온 자연이 일의적인 존재의 평면 위에서 영원히 반복해서 발생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한계 없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짝거리기, 흩어지기, 흐르기, 녹기, 줄어들기, 쪼개지기, 납작해지기, 끓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참견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참견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게 할” 수도 없다(35장). 제이어와 아실의 대화에서처럼, “모든 개체는 가능과 불가능의 종합”이다(38장). 개체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지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자신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먹기를 중단한 슬픈 짐승은 굶어 죽고 말” 것이다(38장).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개체는 다른 개체로 인식되는 것이다.

계통학적으로 볼 때 나는 음식의 하위에 있고 분변의 상위에 있습니다. 입이 위에 있고 항문이 아래에 있는 건 우연이 아니지요. … 필사적으로 그 중간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18장)

의식 자체는 충동들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암호화에 다름 아니다. 암호의 해독은 그 자체로 개인이 획득한 메시지의 전도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머리’(직립자세)로 수렴되고, 메시지의 해독도 이 ‘수직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자세가 인간에게 습관적인 것도 고유한 것도 아니라면, 메시지라고 부를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의미/방향sens은 직립자세로부터 출발하여 상•하•전•후라는 기준들에 의해서 형성된다. (「니체와 악순환」,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2장)

평면적인 존재 위에서 발생한 존재자는 필연적으로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수직적이고 한계를 가지게 된다. 비록 그것이 태생적이든 아니면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든 간에. 존재자는 평면 위에서 수직적인 높이를 가지는 직립자세로 서 있으며, 이것은 반면 위의 바둑돌처럼 자신만의 공간을 점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 곳에 놓인 돌은 죽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자리는 오직 그 돌의 것이다. 돌을 겹쳐놓을 수야 없는 법이다. 상대편의 돌은 물론이거니와 아군의 돌조차도 그 돌의 자리를 범접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돌은 떠밀리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채 목숨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 죽음만이 그 돌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죽은 돌은 바둑판 위로 돌아오지 않는다. (23장)

혼자서 모든 공간을 점유할 수 없기에 내재적인 한계를 지니고, 다른 바둑돌에 고유한 공간을 침범할 수 없기에 다른 존재자에 의해서도 제한되며, 그 반대로 그 자신도 고유한 공간을 점유하기에 다른 존재자의 제한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점들을 인식하고 나서야 우리는 「피를 마시는 새」의 실질적인 쟁점에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우선, 존재는 평면적이다. 그것은 그 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같은 의미(즉, ‘있다’는 사실)만을 준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존재자는 불가피하게 수직적으로는 높이를, 수평적으로는 영토를 지닌다. 권리상으로는 동등한 이 모든 존재자의, 실질적인 높이와 영토는 오직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해질 수 있다(우리는 이 사실을 케이건의 “…할 권리를 주겠소”라는 태도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두 가지이다.

1) 「눈물을 마시는 새」의 시우쇠가 언급했듯이, 존재자의 기본적인 전제는 “일단, 먹고 나서”이다. 피를 마시는 새인 우리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 나무로 태어나지만 나무를 태우는 용처럼) 권리상으로는 평등한 다른 존재자의 높이를 무너뜨리고, 다른 존재자의 영토를 침범한다.

2) 또한 우리는 그렇게 유지하는 우리의 높이와 영토가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따라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노력은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에 예속되려고 애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스스로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존재자를 존중할 수 있는가? 2) 스스로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에게 예속되지 않을 수 있는가?

4. 유료도로당, 서약, 분리주의 – 작품에 나타나는 모순적 양상들

스스로를 유지하려면 권리상 동등한 다른 존재자를 먹어야 한다. 다른 존재자를 존중하면 자신이 굶어 죽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모순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유지는 자기예속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것이며, 이것에 얽매이는 것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두 번째 모순이다. 작품은 서로 얽혀 있는 두 겹의 필연적인 모순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가령 유료도로당이 그러하다. 유료도로당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그들은 길 자체 혹은 평면 자체가 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유일한 평가기준은 통행료의 유무이며, 그래서 유료도로당이 타인에게 요구하는 이 높이는 언뜻 매우 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틸러가 칸디드 백작에게 건넨 충고처럼, 적게 요구한다고 해서 적게 바라는 것은 아니다. 파델 미호린이 유료도로당의 서비스를 이용할 때, 유료도로당은 자신의 강령을 “제국법 위에 놓으려 한다.(10장)” 이것이 유료도로당이 가지는 실질적인 높이이다. 우리는 오히려 평면적인 영토가 넓으면 넓을수록 그것을 인력(引力)으로 끌어당기는 중심의 높이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국이라는 그들보다 더 높은 존재자에 의해 그들의 강령이 잠시나마 파괴되기 전까지, 유료도로당은 그들보다 낮은 다른 존재자들을 일정부분 파괴하며(그것의 이름은 상식일 수도 있고, 도덕일 수도 있다) 스스로를 유지한다. 그래서 제국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이 문제를 조금 다른 형태로 다시 경험할 수밖에 없다. 제국이 사라진 때에 또 다른 파델 미호린이 등장한다면, 유료도로당은 자신을 낮추지 않고 그를 보호해야만 하는가? 병리학적 연쇄살인마가 인간 파델 미호린이 아니라 레콘 그을린발이라면, 유료도로당은 강대한 그가 유료도로를 타고 전세계의 사람들을 “제멋대로 평가(28장)”하도록 그에게 길을 내주어야 하는가? 혹은 반대로, 정의로운 대호왕의 대리자가 이끄는 시모그라쥬 군이 제국의 부재로 인한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북부로 진군할 때, 유료도로당은 그들의 북진을 통행료만 받고 허용해야 하는가? 게라임의 주장처럼 위의 두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유료도로당은 오래 살지만 지독한 피냄새 때문에 배척받는 피를 마시는 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울비의 주장처럼 당의 강령을 버리고 바둑판 위에 올라온다면, 그들은 작품 막바지에서 예상되는 “제국에 극도로 협조적인(35장)” 유료도로국으로 변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서약지지론과 무용론을 둘러싼 문제에서도 유사한 갈등이 발견된다. 제국은 이미 제국령과 귀족령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제국법에 상관없이 자의로 법을 집행할 권리가 있다. 서약은 귀족이 다른 제국민에 대해 가지는 이러한 권리의 우위를 영속화하려는 이데올로기로 해석된다. 틸러는 니어엘과의 대화에서, 능력의 차이가 존재자들 사이의 권리의 차이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서약지지를 거부하고, 합의를 통해 그것을 결정하고자 하는 엘시를 지지한다. 그러나 하나의 의미는 주체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지적했다. 따라서 사모 페이가 말하듯, “투쟁의 고약한 점은 관련자들 중 한쪽만 그걸 투쟁이라고 생각하면 투쟁이 된다는 점(33장)” 때문에, 선택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엘시의 행보는 (칸디드 백작의 지적처럼) 엘시가 제국의 다른 실력자들에 대해 가지는 능력의 차이를 증명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유료도로당의 예에서 그러했듯이, 스스로가 제시하는 투쟁 없는 귀족원 회의라는 공간의 중심에 엘시 자신은 가장 높이 서 있으며, 그 영토를 침범하는 시모그라쥬 군과 싸우려 한다. 정치적 감각이 예민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다이렌 여단장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앞뒤가 안 맞는 소리이다(24장). 결국 말리 위에서 이루어진 치천제와 데라시의 대화에서처럼(34장), 우리는 서약지지와 무용론이 비록 서로 다른 형태라 할지라도 공히 모순을 내재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리주의 역시 위와 유사한 사례로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아실은 사회적 감각이 취약한 레콘을 위한 예외적인 정치구조로써 분리주의를 고안하지만, 그녀의 사상은 락토 빌파와 지키멜에게도 전파된다. 그들은 인간 역시 제국이라는 체제에 취약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타이모가 아닌 아실이 만들고, 지멘이 아닌 락토와 지키멜에 의해 현실화되는 분리주의는 쉽게 눈치챌 수 있듯 레콘보다는 인간을 위한 발명품이다. 아실의 말을 듣고자 하는 레콘은 아마 타인에게 신경 쓰는 소위 가짜 레콘일 테니까. 레콘적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레콘은 영원히 파편화된 개인일 뿐이며, 그것에서 벗어나면 가짜 레콘이 된다는 미시적인 모순 외에도, 우리는 아실의 말에서 분리주의에 내재된 더 근본적인 모순을 눈치챌 수 있다. 분리주의는 대등한 존재자들끼리의 대등한 결합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분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대등한 존재자들은 계속해서 언급되듯이 다른 존재자를 먹음으로써 자신을 유지하려 한다. 아실은 “궁극적인 목표가 30만년의 시간과 600조의 희생 이후 달성(34장)”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허구적인 희망에 불과하다. ‘먹기’에 관련된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내재적 모순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갈등의 역사를 거듭 반복하게 될 것이다.

5. 가축을 만드는 제국 – 본질의 부여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치천제는 사람의 신이 되는 방법을 택한다. 권리상으로 동등한 존재자들이 더 높은 높이와 더 넓은 영토를 가지기 위해 다툴 때, 그들을 단숨에 다시 동등하게 만들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보다 훨씬 더 높은 높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도 “긴 선”에 관한 바스톨 장군의 말을 통해 동일한 사유를 접한 바 있다(「폴라리스 랩소디」, 14장). 또한 엘시와 니어엘의 대화에서도 그것의 변주를 들을 수도 있다. 전사끼리, 위관끼리, 장군끼리는 싸움이 성립한다. 그러나 대장군끼리는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28장). 제국법보다 더 위에서, 치천제는 도시연합까지 아우르는 모든 땅을 자신의 영토로 삼는다. 그리고 그 영토 위에 존재하는 제국민에게 자신이 주조한 본질을, 즉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나가들이 심장탑을 버리고 평면적으로 퍼져나가고자 할 때, 이라세오날의 사자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수직적인 높이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39장).

이러한 발상은 작품 내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레콘 그을린발의 숙원은 코끼리의 가축화이다. 그리고 가축화의 핵심은 그들의 종족적 목표를 주인과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가축들의 목표는 번식이며, 그래서 사람이 그들의 번식을 통제하는 것이 그 목표를 위해 적합하다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의 목표는 무엇인가? 같은 사람들을 ‘먹음’으로써 자기를 유지한다는 모순을 해갈하는 것이다. 치천제는, 법과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의 범주에서 같은 사람들을 골라낸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의 조련 후, 이 행동거지의 울타리가 사람들에게 본능의 수준으로까지 각인될 때, 사람은 모순을 극복하게 된다. 이는 니체가 말하는, “인간의 개선”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 시대든 사람들은 인간을 ‘개선시키기’를 원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바로 도덕이 의미하는 바다. 그런데 같은 단어 밑에 더없이 서로 다른 경향들이 숨어있다. 짐승 같은 인간을 길들이는 것뿐 아니라, 특정한 인간 종류의 사육도 ‘개선’이라고 불리어왔다. (「우상의 황혼」, 프리드리히 니체,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치천제의 전략이 사람의 가축화라면, 전술은 무엇인가? 1. 모든 사람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제국은 모든 공간을 빠짐 없이 장악한다. 하늘치는 하늘에 떠 있으며 동시에 이동할 수 있으며, 그래서 수직적으로는 같은 높이만큼 떨어져 있고 동시에 수평적으로는 (데라시의 생각대로) “중심과 변두리의 구분 없이(2장)” 온 대지를 아우른다. 하늘누리와 치천제가 없어진 이후엔 유료도로국이 제국의 공간적 장악을 도울 것이다. 2. 성장에 방해가 되는 “가지를 잘라야(12장)” 하기 때문에, 말리와 아라짓 전사라는 이름의 가위와 톱을 마련한다. 그들은 제국민을 압도하는 폭력을 가지고 그들을 조련할 것이다. 3. 긴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필요한 상황에만 깨어나며, 그 외의 시간엔 냉동된 채 잠들어 있다. 그녀가 세운 울타리를 감시하는 역할은 그녀의 대리자가 수행한다.

치천제를 대리할 요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이 그녀의 기획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우선 그녀가 마련한 삼고(三高)는 아실, 제이어 솔한, 레이헬 라보이다. 그들은 각각 “분리하는 유수, 실패하는 사도, 죽은 태위”라고 표현된다(37장).
1. 분리는 공간적 한계이다. 아실의 기획은 각 존재자를 엄격히 분리시킴으로써 각자가 동등한 육체적/정신적 영토를 점유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먹이로 여기지 않기 위해선 엄격하게 분할되어 침범할 수 없는 공간적 분리가 필요하다.
2. 실패는 능력적 한계이다. 제이어의 행보는 자신의 능력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가능과 불가능을 가르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치천제는 제이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먹을 수 없도록 개인의 능력을 제한하는 선을 설정하고자 한다.
3. 죽음은 시간적 한계이다. 치천제에 따르면 레이헬 라보는 “아직 효용성을 얻지 못했고, 죽음의 시험을 통과해야(37장)” 비로소 쓸모 있게 될 것이다. 죽음의 시험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레이헬 라보의 상태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레이헬 라보는 군령자이고, 군령자는 육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런데 육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육체가 정신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존재는 일의적이며, 개념은 발생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다. 그러므로 정신은 당연히 육체로부터 발생하는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다. 따라서 육체가 없다는 것,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정신이 더 이상 변화할 기반 자체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령자 속의 영혼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한계에 의해 고여버린 영혼이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라자루스 리플렉션(Lazarus reflex: 뇌사 상태에서도 육체가 척수반사에 의해 움직이는 현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정신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죽음을 경험하기 전까지 만들어냈던 테두리 안에서 기계적 작용/반작용을 반복할 뿐이다. (이 반복은 생명의 비가역적인 선적 반복과는 다르다. 생명은 ‘죽음’이라는 끝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생성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레이헬 라보는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고, 개념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전령을 삶의 연장인 것마냥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령하지 않고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죽기 전까지 형성했던 울타리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엄중히 지키는 군사적 파수꾼이 될 것이다. 죽음을 통해 지키고,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다른 사람의 삶에 침투시키는 파수꾼.
사람을 분리시키고, 실패시키고, 죽이기. 삼고는 각자 사람의 한계를 획정하는 특기를 가지며, 이를 통해 새로운 황제를 보좌할 역할을 부여 받는다.

치천제의 후계자 후보는 엘시와 스카리 두 명이다. 둘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긴 하지만, 어쨌든 황제의 자격이 있다. 그 자격은 무엇인가? 물론 치천제가 기획한 사람의 본질을, 삼고의 도움을 통해, 충실히 주입하는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엘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스카리의 자격이 무엇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우선 피증여자의 위치에서, 그는 “보기 드문 진솔한 인물(33장)”이다. 그는 타인에 의해 주조된 의지를 능숙하게 자신의 것으로 바꾼다. 작품에서 그의 이런 착란은 주로 그의 식습관을 통해 암시된다(어쨌거나, 「피를 마시는 새」는 먹기와 싸기라는 기초적인 생리활동에 매우 민감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즉, 그는 항상 취해있다. 반대로 증여자의 위치에서, 그는 가축을 만드는데 능숙한 인물로 나타난다. 부냐가 스카리에게 “제가 당신이 키우는 짐승”이냐고 물을 때(21장), 그녀는 스카리를 매우 정확히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스카리의 인질로서 치천제에게 억류되어 있을 때에도 그녀는 스카리가 그녀의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34장). 우리는 이러한 스카리의 성격이 치천제의 가축화 기획에 잘 들어맞으리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는 황제가 내려주는 본질을 가장 잘 체화할 재능이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엘시의 성격은 어떠한가? 엘시의 매우 독특한 성격은 스카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식습관에서 잘 드러난다. 어떤 면이 독특하냐 하면, 그가 항상 배가 고프다는 점이 그렇다.

집주인이 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1장)

쏟아진 비에 몸이 상당히 젖었고 업무 인계 계획을 수립하느라 저녁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엘시는 허기를 느꼈다. (6장)

그리고 이레. 우리는 곧 야간 비행을 할 거잖아. 그러니 식사는 그냥 생략하지. (24장)

“식사 반입을 하루 국 한 그릇으로 줄여라. 저런 인간에게 제대로 된 식사는 사치다!” (11장)

엘시 에더리는 땅에 손끝을 대었다가 다시 허리를 폈다. 손가락 끝에 묻은 흙을 바라보던 엘시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엘시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먼 곳을 보며 흙을 맛보았다. (29장)

엘시는 항상 허기져 있지만, 상황은 언제나 엘시로 하여금 식사를 거르게 만든다. 독자들이 엘시가 식사를 하긴 할 것이라 판단하게 만드는 장면에서도 상황이 나아지진 않는다. 오히려 엘시의 식사량은 더 줄어들 뿐이다. 작품 내에서 엘시가 먹는 것은 술, 물 그리고 무기물인 흙 뿐이다.(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우물에서 먹었다고 암시되는 국도 포함해야 할까?) 먹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가 ‘자기 유지를 위해 대등한 상대를 먹는다’는 모순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먹기’는 파괴행위이며, 당연히 상대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도 ‘먹기’에 포함된다. 타자는 ‘먹기’의 이러한 측면을 이미 오스발의 입을 통해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사람들이 외치는 자유는 곧 남에게 간섭할 권리, 즉 복수의 권리(「폴라리스 랩소디」, 23장)”라고 이야기한다. 전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도 쥬타기 대선사는 “죽음을 강요하든 삶을 강요하든(「눈물을 마시는 새」, 4장)”, 상대의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둘이 같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악령」에서, 끼릴로프는 “자살”이야말로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즉 초인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은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까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이어진다. 삶과 죽음의 선택이야말로 가장 고유한 개인의 권리인 것이다). 시카트와 스카리가 그녀를 멋대로 죽이려 할 때, 반대로 틸러와 사라말이 그녀를 멋대로 살리려 할 때,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정우를 ‘먹는다.’ 그러나 엘시는 먹지 않으며, 그 때문에 정우가 규리하공이 되기를 거부할 때에도, 데라시로부터 라수의 방 개방 요청을 받을 때에도, 혼례를 권유 받을 때에도, 군정자문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서 아스캄 출장을 요구할 때에도, 엘시의 행동이라곤 그의 권한 내에서 그녀의 상황과 선택지, 그 결과 등을 설명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다(특히 맨 앞의 경우에서 정우는 반역자로 몰려 죽을 수도 있음에도 엘시는 정우의 대답을 긍정한다). 정우가 엘시를 “하늘치처럼 친절(31장)”하다고 표현할 때, 그녀가 지적하는 것은 엘시의 단식성(斷食性)이다. 그의 영역의 침범(봉사의 영역이든, 사생활의 영역이든)에 대한 민감함은 그의 단식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가 하는 행동 역시 모두 그에게 주어진 본질, 법, 권한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는 그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뿐, 뭔가를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부냐를 닮아있기도 한다.

“내겐 결정권이 없어.” (28장)

“하지만, 그 년이 불쌍하다고는 말하지 마. … 물론 너는 니어엘이 헨로 가 사람들을 이끌고 발케네로 도망쳤어야 했다고 말하겠지. 그건 중요한 것이 아냐. 중요한 것은 니어엘이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는 거다.” (15장)

제국 황제는 제국법 위에 있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는 자이므로, 엘시는 제국을 대상으로 황제가 내리는 결정들의 정당성을 긍정한다. 데라시가 거부하긴 했지만, 만약 그가 엘시에게 부냐를 버리고 정우와 결혼하는 것이 황제의 의지라고 전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 것인가? 아마 엘시가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엘시는 대가를 바라고 황제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장). 그는 치천제가 그럴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 결정을 따른다. “규리하로 진격하라”는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엘시에게 납득시킬만한 이유는 간단하다. “짐이 명령하니까.”(38장) 따라서 그가 부냐나 제국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간헐적인 음주처럼 드문 착각(스카리스러운 착각)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치천제가 엘시를 “가장 부도덕한 사람(37장)”이라고 칭할 때, 이것은 엘시가 도덕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도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엘시가 스카리와 다른 성격을 가졌다면, 다름아닌 바로 이 점에서 반대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즉 기묘한 폭식성으로 모든 것을 가림 없이 소화하는 스카리와 달리, 단식적인 엘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래서 소화하지 않는다. 스카리가 황제의 도덕을 잘 체화하기 때문에 황제의 자격이 있는 반면, 엘시의 경우엔 그것을 어떠한 여과 없이 통과시키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엘시의 특징으로부터 우리는 거꾸로 치천제가 어떤 인물인지 추적할 단서를 얻게 된다. 치천제도 엘시만큼이나 독특한 식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편식성(偏食性)이라고 해야 더 적합할 수도 있다. 작품의 본문에서, 엘시는 이 점을 흘리듯 말한 바 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선 음주도 하지 않으시고 잡수시는 것 또한 제한되어 있습니다. 먹거리가 제외되는 것만으로도 특산품의 상당수가 제외됩니다.” (2장)

외전이자 프리퀄 격인 “정석”에서, 원시제가 라세의 먹이를 제공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라세의, 혹은 용의 편식성이다. 전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케이건은 용에 대해 “주인이 키우는 대로 자라나며, 일단 주인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눈물을 마시는 새」, 4장). 사모 페이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용은 손보다는 마음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11장). 용은 주인이 주는 것만을 먹고, 주인이 키우는 형태로 자라난다(여기에서 우리는 용이 본질적으로 ‘가축’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선 후에 다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발케네의 학살을 반대하는 지알데 락바이가 “모둠살이의 약속인 도덕으로” 치천제의 제국 구상에 반대할 때, 그녀는 자신이 “법 위에 있기 때문에 약속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말한다(12장). 그녀의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용으로서, 그녀는 사람으로부터 태어나고 공동체에 의해 자라지 않는다. 그녀는 나무로 태어나 원시제라는 개인에 의해 길러진다. 또한 황제로서, 그녀는 약속의 ‘위에’ 있기 때문에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 사라말이 사람은 “계통학적으로 음식의 하위에 있고 분변의 상위에 있다(18장)”고 말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위치는 의미심장하다. 제국이 황제의 ‘하위에’ 위치한다는 것은 제국이 황제의 거대한 분변이라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시제가 “제국을 전대미문의 화장실(외전)”로 정의할 때, 그녀는 황제와 제국 사이의 계통학을 분명히 겨냥하고 있다. 치천제의 독특한 편식성은 마치 치천제 – 엘시의 관계처럼, 그녀 자신도 원시제를 대리하는 목자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6. 집단도? – 유심론과 실재론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지 않은가? 애초에 우리의 모순은 두 개였다. 즉,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존재자를 먹는다는 것과, 스스로를 유지함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예속된다는 점이다. 치천제가 해결하는 모순은 전자뿐이며, 그 방법 또한 후자를 강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본디 실존하는 존재자는 일의적인 존재로부터, 즉 ‘있다’라는 하나의 사실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시간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반복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존재자가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필자의 이전 글인 ‘「폴라리스 랩소디」 다시 읽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것은 자연의 에너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치천제는 실존하는 존재자가 가진 이 힘을 ‘거세’함으로써, 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상을 본질화시킨다.

계획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매우 재미있는 결과가 우리를 기다린다. 황제가 ‘먹기’를 금지하므로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엘시처럼 시간적/능력적/공간적 분리에 의해 단식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남아있는 유일한 ‘먹는’ 존재자는 원시제의 유지를 먹는 치천제이다. 이러한 구도는 사라말의 독백이 던지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음식과 분변 사이에 위치하려고 애쓴다. 집단도?’ (19장)

헤겔은 낮과 밤을 하루라는 제 3의 상위 개념으로 지양(aufheben)시킴으로써 2자 사이의 모순을 통합시킨다. 우리는 개인과 개인을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지양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집단과 개인 간의 개념 설정의 문제는 작품에서 은밀히 반복된다. 처음에 이것은 유머러스한 뉘앙스를 가지고 시작된다.

키탈저 사냥꾼은 잘린 다리를 집어 들었다. 아라짓 전사는 헐떡이며 질문했다. “왜 그걸 집어 드는 거지?” “은인의 다른 부분이여. 이 부분이 더 가벼우니, 마을까지 가지고 돌아갈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6장)

사람을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본다면, 사람을 구성하는 부분들 중 생명을 앗아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이 그림을 확대하여 집단을 개인의 상위 개념으로 정의한다면, 집단은 개인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쓸모 없는 부분을 적절히 처리한 치천제의 행보는 옹호되고, 은인의 쓸모 없는 부분을 가지고 귀환하는 키탈저 사냥꾼은 자신의 배은망덕함을 비판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치천제의 행적은 정당성이 없어지고, 키탈저 사냥꾼은 제 행동에 큰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모와 엘시가 갈라지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안정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영원히 이어지는 혼란과 살육의 제국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인가?” “만족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좌절과 노화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 “개인의 단위에서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개인 없이는 집단도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기준을 집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 개인에게는 더없이 옳은 네 말이라도 집단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훼손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33장)

“집단도?”라고 묻는 사라말의 고민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나무가 “뿌리와 줄기, 가지 잎의 총합이 아니듯(12장)”, 제국도 제국민과 행정체계, 영토 등의 단순한 총합은 아니다. 율형부사인 그가 하는 일은, 제국민, 행정체계, 영토 등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그것들에 ‘법’이라는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제국을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은 “레콘은,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개인주의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사라진다(14장)”고 선언할 때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그런 그가 “용을 기다리고 있다(8장)”고 말할 때, 그는 어느 특정 개인을 기다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나가는 법을 먹여 기를 ‘한 마리의’ 제국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한 마리 용이 소유주가 주는 먹이를 먹고 그가 바라는 대로 자라나듯이, 한 마리의 제국은 “황제”라는 하나의 입을 통해 (사라말이 주는 올바른 먹이인) 법을 먹고 자라날 수 있다. 사라말에게 엘시가 중요한 이유는, 엘시가 그 먹이를 올바르게 먹어줄 입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제국이라는 개념은, 일단 그것이 인정되고 나면, 그 자신의 일부를 이루는 부분들에 대해 특별한 행위를 할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그것은 부분으로 하여금 개성을 포기하고 집단을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그 희생은 작게는 “분열 행진을 위한 자기가 걷는 방식의 포기(15장)”일 수도 있다. 혹은 크게는 “정원사에 의해 잘려나가는 나뭇가지”일 수도 있다. 사라말은 제국이 개인을 초월한 유기체임을 인정할 때, 그것이 개인들을 “가지 쳐내듯(12장)” 처분할 권리를 허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고통 끝에 깨닫게 된다. 그가 “친구를 위해 자신의 용을 죽이려” 할 때(38장), 이것은 단순히 치천제를 죽인다거나 엘시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이제껏 옹호하던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제국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사라말의 이러한 고민에서 철학의 오래된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보편 논쟁이 그것이다. 개개의 존재자들을 지양을 통해 묶어주는 유(類)와 종(種) 개념은 실재하는 것인가(실재론)? 아니면 단순히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에 지나지 않는가(유명론)? 우리는 이 질문 자체보다는 그 근저에서 이러한 구조를 탄생시키는 기반에 주목해야 한다. 실존하는 개체의 ‘윗’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개인보다 ‘탁월한’ 집단이라는 개념은 어느 대지를 자양분 삼아 나타나는가? 그것은 존재론적 다의성의 세계에서 자라나는 결과물이다.

7. 제논의 화살 – 힘은 어디에 있는가?

치천제의 울타리를 거부하고 우리 안의 발생적인 힘을 옹호한다면, 결국 다시 기존에 제기한 모순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먹음’으로써 자기를 발생시킨다. 그렇게 발생한 자신은 우연적인 가상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곧 자기예속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상을 배격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사람이 불가피하게 “직립자세”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가상 자체는 우연적이지만, 가상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습관은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본성에 속하는 것은 바로 습관을 들이는 습관이다. Les habitudes ne sont pas de la nature, mais ce qui est de la nature, c’est l’habitude de prendre des habitudes.”라는 베르그송의 말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들뢰즈의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재인용). 이것은 마치 제논의 역설과도 같다. 쏘아진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우리는 그 화살이 시작점과 과녁의 절반 지점이 통과할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의 절반, 또 그것의 절반의 절반, 다시 그것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으로 무한히 진행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각각의 순간을 잘라내어 화살이 각각의 지점에 도달하는 정지화면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화살은 과녁에 끝없이 다가가지만, 결코 과녁을 맞출 수는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지된 화살을 상상한다고 해서 화살이 정말로 정지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날아가는 화살을 찍더라도, 사진에 찍힌 화살엔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잔상이 존재한다. 또한, 우리는 움직이는 화살을 통해서만 화살에 작용하는 힘을 인지할 수 있다. 힘은 화살이라는 가면을 쓰고 가시화되며, 또한 화살의 운동은 화살의 위치를 연속적으로 늘어놓는 연극을 통해 인식된다(가면과 연극은 니체의 주요한 모티브이다). 우리가 아무리 세밀하게 화살을 인식하더라도, 우리의 눈은 움직이는 화살을 매우 작은 프레임 단위로만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가상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이 가상을 통해서만 그 근저에 흐르고 있는 힘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 방식을 미분의 방식에 빗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예일 수 있다. 미분이야말로 가시적인 운동을 통해서 그에 숨겨져 있는 힘의 작용을 파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몇몇 개념에 라이프니츠가 감명받은 것도, 그리고 그런 라이프니츠가 미분방정식을 고안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미분의 개념은 보통 다들 잘 알 것이라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좀 더 쉬운 개념 설명이 필요하다면 마틴 가드너의 「쉽게 배우는 미적분학」을 추천한다)

따라서 가상은 이면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을 자신의 한계 안으로 가둔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 한계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 또한 알려준다. 이것은 경계선이 양가적인 성질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유럽의 바를러라는 도시 안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가르는 국경선이 지나간다고 한다. 국경선 이편은 벨기에이고, 국경선 저편은 네덜란드로 정해진다. 그렇다면 그 선 자체는 어디에 속하는가? 경계선은 이편과 저편에 동시에 맞닿아 있고, 따라서 양 쪽의 특징을 동시에 가진다. 이편의 끝이자 ‘동시에’ 저편의 시작인 것이다. 가상이 이면적인 이유는 그 자체가 발생적이며, 따라서 경계적이기 때문이다. 가상은 힘을 자신의 한계 안에 가두지만, 힘은 가상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발생적인 힘을 표현한다.

8. 무명 학자가 말해주는 것 – 한계를 인식하는 다양한 방법들

사람은 가상을 통해서 자신을 한계 짓고,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려 한다. 하지만 가상은 또 다른 가상, 기존의 것과는 다른 가상을 발생시킴으로써만 벗어날 수 있다. 변화의 주체인 힘이 가상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가상으로부터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재미있는 것은 인간을 제외한 세 선민종족, 즉 나가, 레콘, 도깨비는 각자 불가피하게 기(旣)생성된 가상을 인식하는 독특한 기재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선민종족이 가질 수 없는, 배타적인 특징으로 나타난다. 「피를 마시는 새」의 제사로 등장하는 “하이스 대학에 보관된 무명학자의 일기”가 우리에게 이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나가는 특별한 공간감각을 가지며, 이것이 그들을 쉽게 가상이 가지는 공간적인 한계로 인도한다. 학자는 그들이 “경계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가진다(제사)”고 말한다. 육체적으로 나가는 몸의 형태 변화에 익숙하다. 육체의 파손 역시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데, 그들의 육체는 수시로 변하고, 쉽게 다시 자라나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는 자신과 다른 나가의 정신을 칼같이 구별하지 않는다. 니름을 통해 그들은 타자의 정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나가는 그 반대급부로 육체적으로는 외부의 온도에 크게 좌우되고, 정신적으로는 다른 나가의 니름에 취약하다(륜과 갈로텍은 각각 화리트와 륜에 의해 정신을 억압당한다). 바로 취약성이 그들 자신에게 인식되는 가상의 공간적인 견고함을 쉽게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따로 신경 쓰지 않으면 귀머거리나 다름없는 육체적 단점과, 직접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니름의 활용이라는 대체재에도 불구하고, 나가가 육성 언어를 습득하는 이유는 바로 이 취약성에서 기인한다(38장). 언어는 사람이 발생시키는 가상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이다. 언어만큼 강력하게 현상을 중립화시키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가장 견고한 가상이며, 그래서 정체성은 언어를 기반으로 강력하게 유지된다. 나가에게 있어서 언어는 선천적으로 취약한 그들의 정신에 ‘자아’라는 경계를 그어주는 도구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언어 역시 자신의 근저에 변화하는 힘을 접어 넣고 있으며, 언어에 민감할수록 그 한계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폴라리스 랩소디」의 바탈리언 남작이 자신의 도구인 언어의 한계에 그토록 민감해 하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언어 자신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폴라리스 랩소디」, 8장)

레콘은, 이렇게 말하면 좀 싱거울 수도 있지만, 특출난 힘이라는 능력을 가진다. 아실의 말대로 그들은 실존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9장). 세계가 변화의 커다란 장이라는 것이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단단한 ‘자신’이라는 껍질에 비해 그 외의 만물은 물러터지기 그지없고, 그래서 그들은 가상이 가지는 엉성함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을 제한하는 무언가를 마주할 경우, 그것은 그가 평생을 두고 추구할 만한 것, “절대 변하거나 퇴색하지 않는 단단한 사명(제사)”, 즉 숙원이 된다. 숙원은 무엇보다도 단단한 자신의 한계에 대한 맹렬한 추구이다. 그리고 그 한계를 추구하기 위해 (야리키가 말하듯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한계로 몰아붙인다(23장). 명시적으로 말하는 자는 지멘 한 명이지만, 모든 레콘은 최종적으로 하나의 공통적인 숙원을 추구한다. “오직 하나의 액체, 그 흔한 액체만이 레콘의 도전에서 보호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1장).”

도깨비는 그들의 독특한 이중 삶으로 말미암아 가상의 시간적 한계를 인식하는데 능하다. 도깨비의 죽음은 군령자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육체를 아예 잃어버린 군령자와 달리, 그들은 신이 준 선물인 “불”이라는 형태로 살아간다. 그들의 죽음은 그래서 다른 종족의 그것과는 달리 다른 육체를 가지는 두 번째 삶과 같다. 단지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한 연료로서 다른 도깨비의 육체가 필요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삶의 긴 시간을 보장받은 상태로, 육체적, 정신적인 온갖 가상들이 (그들과는 달리)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생성과 사멸을 반복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잠깐만요. 지금 제가 반은 도깨비라는 말을 들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 그런데 제가 완전한 인간이었다면 그 말씀 안 하셨을 거란 말이죠?” “안 해.”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게 될 테니까?” “가능성이 높아.” … “묘하네요. 제가 킴들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시시한 것에 열중하는 킴들을 봤거든요. 저는 그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말씀 듣고 생각해보니까 그 사람들이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서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건가? 아, 어렵다. 새님이 있으시면 좋을 텐데.” (23장)

짧은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일시적인 가상을 본질인양 착각하는 것에 대해 니체는 이미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변하지 않는 성격 -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옳지 않다; 자주 인용되는 이 명제는 오히려 인간의 짧은 삶의 기간 동안에 영향을 끼치는 동기는 대개 몇 천 년 동안이나 새겨져 있던 문자를 파괴할 정도로 깊이 균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8만 살의 인간을 생각해보면, 그에게서는 아주 가변적인 성격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서 수많은 다양한 개인이 잇달아 발전되어 나올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특성에 관한 여러 가지 잘못된 주장들이 제기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프리드리히 니체, 2장)

(여담이지만, 인용된 이 텍스트가 전작의 한 인물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 필자는 거의 확신한다. 그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각양각색의 개성을 억제하기 위해 “한 번에 하나씩만 요구해, 제발!”이라고 속으로 비명 지를 때, 그는 긴 시간 동안 겹겹이 쌓여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게 된 수많은 개성의 분출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 5장) 

도깨비는 “짧은 사랑, 짧은 재미, 짧은 웃음을 새로운 이유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는(제사)” 종족이다. 분노나 원한은 진득하고 오래간다(우리는 쉽사리 ‘불구대천의 원수’, 혹은 ‘이 원한을 평생 잊지 않겠다’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그것들은 자신의 대상을 자신을 슬프게 만드는 원인으로만 생각하게 만들며, 이에 집착하게 만든다. 따라서 분노와 원한의 대상을 파괴하기 전까지, 그 대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슬픔으로 몰아간다(「에티카」, 바뤼흐 드 스피노자, 3부 정리 13 주석). 도깨비가 아킨스로우 협곡이나 페시론 섬의 모든 것을 파괴한 이유는, 그곳에서 도깨비들이 도저히 즐겁게 만들 수 있을만한 요소를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한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가, 레콘, 도깨비가 각각 공간적/능력적/시간적 한계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종족은 가상을 인식하는 나름의 태생적인 방법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신이 나눠준 선물의 특성과 일치한다. 나가는 신명, 즉 이름을 선물 받는다. 그리고 이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 본질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며, 무엇보다 공시적 구분, 즉 공간적 구분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타자의 단편 「골렘」에서도 이러한 테마를 볼 수 있다). 레콘의 무기는 강인하고 단단한 그들의 분신이다. 무기와 함께 그들은 자신과 마주한 무른 대상을 부수고 자신만큼이나 단단한 숙원과 마주한다. 도깨비의 불은 그들의 연장된 삶을 가능하게 한다.

9. 익사한 레콘은 물에 들어간 레콘이다 –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예비하는가? 한계에 직면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미지의 것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은 필연적으로 가상이며, 따라서 인식 너머에는 인식이라는 “성긴 그물이 건져내지 못하는, 그물눈 사이로 빠져나가는 보석(22장)”과도 같은 실재의 여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존의 인식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마주하는 것은 새로운 인식을 발명하는 것이고, 곧 새로운 가상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테마는 전작들에서도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대륙의 서쪽, 이곳에서 인간은 그 종족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무서운 도전을 받았습니다. 아무르타트가 바로 그것이죠. … 그렇습니다. 아무르타트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우리 헬턴트의 주민들이 변화했습니다. 그 변화의 모습은 저로서는 정확하게 묘사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에게 일어난 최초의 변화이고, 따라서 비교해 볼 다른 대상이 없습니다.” (「드래곤 라자」, 15장)

“왜 사랑할 수 없을까? … 우리의 서로 다른 겉모습은 광적인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다시 없이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사람은 새로움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늘이 덮인 저 남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의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극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눈물을 마시는 새」, 16장)

실패는 기존의 인식으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실재의 소여(所與)를 마주함이고, 따라서 그것을 적절히 담아낼 새로운 가상을 개발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실패하기 전까지는 기존의 인식이 적절하지 못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직껏 아무도 규정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여태까지 아무도 신체의 모든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신체의 구조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티카」, 바뤼흐 드 스피노자, 3부 정리2 주석)”이라고 지적한다.

도깨비의 긴 시간을 갖지 못하는 정우가, 인간의 “짧은 생명을 빛나게 하는 것을 찾기 위해 특히 레콘에 기대하는(39장)”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나가처럼 니름을 할 수 없고, 아직 인간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레콘은 능동적으로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데에 익숙한 종족이다.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하는 레콘은, 바로 그렇기에 가능과 불가능을 딱히 염두에 두지 않고 “일단 시작하는 성격(23장)”을 가진다. 레콘의 삶의 목표는 숙원 하나이며, 그렇기 때문에 레콘의 삶 자체는 숙원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긴 실패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의 반복이야말로 한계의 발견이자, 그것의 돌파 자체이다. 타이모의 말이 이러한 레콘의 삶을 명시적으로 나타낸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3장) 

삶의 사관학교로부터. – 나를 죽게 하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우상의 황혼」, 프리드리히 니체, 잠언과 화살)

이 말을 되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멘은 유료도로당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지멘이 배를 탄 이후 하텐그라쥬를 향하면서부터 보이는 변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명백히 도깨비 또는 정우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는 누군가의 죽음 이후엔, 그와는 어떤 것도 같이 할 수 없다는 점에 주저한다.

“준람. 자네가 살아있어서 이렇게 싸울 수도 있고 옛이야기를 할 수도 있잖나?” (9장)

이점에서 그는, 자신을 한계에 밀어붙이는 데 익숙한 레콘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독특하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치천제를 살리는 장면 역시 그의 이러한 독특성을 잘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에게 사라말처럼 “개척자(39장)”라는 칭호를 주어도 좋을 지도 모른다. (혹은 전작의 티나한에게 진정 그 말이 어울릴 지도 모르나, 우리는 비형을 씻긴 후의 티나한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 그는 이미 물이라는 한계를 넘은 레콘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발한 레콘임과 동시에, 물 너머에서 완전한 끝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낸 레콘이다. 그의 무기가 망치인 것이 참 공교롭기도 하다. 왜냐하면 니체의 저서 중 우리가 참고로 사용한 책의 풀네임이 「우상의 황혼 또는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체에게 있어 이 망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망치는 하나의 도구지만, 그것을 통해 못을 박을 수도 있고 뽑을 수도 있다. 이중의 방향을 지닌, 파괴하면서도 동시에 건설하기 위한 도구가 바로 니체의 철학, 망치의 철학이다. 지멘의 파괴와 생성은 그의 무기에 이미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해 봄직하다.

지멘의 이러한 변화를 뒤이어 다른 레콘 역시도 경험한다. 왕벼슬은 시모그라쥬 군에게 억류되어 있을 당시, 다른 레콘들이 물의 공포를 잊기 위해 나름의 도망칠 구석을 찾는 것과 달리, 정면으로 물과 마주하고자 한다.

“있잖아, 이레. 사람은 어느 정도 무서운 것은 피해. 하지만 무서움이 극도로 심해지면 오히려 무서운 것에 정면으로 부딪쳐. 물론 어떤 사람은 정말 용감해서 그렇겠지. 하지만 무서운 것에 부딪혀 자기를 죽여버리면 최소한 공포는 그만 느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자포자기 식의 심정 때문에 그러는 수도 있어. 내가 그랬지. 나 그 때 물에 몸을 담가보려고 했어. … 내가 다리를 찾아낸 것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물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대신 그 아래에도 뭐가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 거지” … “당신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물과 싸울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제 물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 잊은 겁니다. … 당신은 용감하니까요.” (24장)

물론 모든 레콘이 지멘이나 왕벼슬처럼 한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레콘들은 그 한계에 도달하더라도 그 한계를 애써 부정하거나, 그들에게 익숙한 다른 한계 즉 죽음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보인다. “금을 밟는 것”만으로도 한계 상황을 떠올리는 민들레 여단의 레콘들(24장)은 어떤 형태로든 선을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전자이고, 자살용 밧줄을 꼬는 론솔피는 후자이다. 이들은 “용기를 버리고 승리한(16장)” 레콘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한계를 돌파할 용기를 버렸으며, 그 한계를 끝내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왕벼슬은 “용기를 가지고 패배(13장)”하려 한다. 엘시가 말하듯, 왕벼슬은 한계 상황에서 살 길, 즉 “활로(37장)”를 모색한다. 그것은 실패한 기존의 가상을 대체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다.

10. 성(姓), 인간의 죄 –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

위의 사항들을 살펴본 후엔,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던져진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한계를 인식하는가? 그리고 그 한계를 마주하여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것인가? 작품에서,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는 “죄”라고 표현된다. 모든 생명은, 심지어 식물마저도, 죄를 가지고 있다. 죄는 생명의 일부이며,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죄는 “혼란을 퍼뜨리는 파렴치한 힘”이다. 우리는 이제 본질, 한계, 법의 시각에서 그것이 죄라고 정의되지만, 실존과 생명의 시각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발생적인 힘, 창조적 에너지, 생성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각 종족들의, 그들만의 죄를 저지르는 방식을 안다. 그렇다면 정우가 결국 그토록 알기 원하는, “인간의 죄(39장)”는 무엇인가? (39장)

전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인간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남매’였다. 사모 – 륜, 비아스 – 화리트, 카린돌 – 화리트, 갈로텍 – 세페린, 케이건 – 극연왕의 관계는 ‘모순’이라는 작품의 핵심 테마와 어우러진다. 「피를 마시는 새」에도 그러한 중요성을 가지는 인간관계가 나타나는가? 그렇다. 작품 외적으로든(독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어찌 됐든 전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내적으로든(「피를 마시는 새」 자체는 1~2년 정도의 시간적 경과를 가지지만, 작품에 관여하는 주요 사건들은 전 세대인 원시제의 시간과 공명한다), 「피를 마시는 새」는 시간의 흐름을 품고 있으며, 그 기간은 적게는 제국의 탄생을 기준으로 30여 년, 많게는 북부의 왕이 귀환한 이후 40여 년 정도이다. 이는 인간을 기준으로 두세 세대 정도가 시대의 주인공으로 활약할 만한 기간이며, 작품이 진행되는 시기에는 그 세 세대 중 가장 윗대(즉 작품의 젊은 인물들의 조부뻘 되는 인물들)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은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에는 유독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부각된다. 이 관계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이저 규리하 – 정우/이이타/시카트 규리하
락토 빌파 – 스카리 빌파/헤어릿 에렉스
도르/모디사 헨로 – 니어엘/부냐 헨로
게라임 지울비 – 시오크 지울비

2세대 한정에서 벗어나 직계혈연으로 대상을 확장하면 다음의 관계들이 추가된다.

홀빈 퍼스 – 마진 퍼스 – 레데른 퍼스 – 지키멜 퍼스
세미쿼/토프탈 – 팔디곤 토프탈 – (베로시 토프탈) – 아쉬존 토프탈

피가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유사 부모자식 관계를 띠는 대상들도 있다.

헤치카 – 돔 헤치카
타이모 – 아실
사모 페이 – 그리미 마케로우 – 이라세오날 – 엘시 에더리

이 부모자식 관계에서 어떤 공통점이 보이는가? 위의 예시 중 필자가 설명하고 싶은 인물은 헤치카 – 돔 헤치카이다. 돔은 최후의 대장간에 이주 왔던 장사꾼이 버리고 간 아이이며, 헤치카는 그런 그를 먹여 살린 다음 자신이 만든 무기 파는 일을 시킨다(5장). 그러나 사라티본 군의 대량 주문으로 돔이 의도치 않은 1년 간의 휴식에 접어든 후, 그는 자신이 헤치카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떠난다.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이 앞으로 사용할 성(姓)이 “헤치카”임을 대장장이 헤치카에게 알려준다(26장). 다른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관심만을 가지는 레콘이, 그것도 스스로는 성을 가지지 않는 레콘이 인간의 아이에게 성을 가질 것을 권하고 거기에 대한 조언을 한다는 것은 아마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리라. 그가 시대의 흐름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 흐름에 흘러가는 타인에 대해 알 수밖에 없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자신의 자리에 고정되어 천천히 흘러가는 “교사와 같은(5장)” 레콘이어서 그런 것인가? 어쨌든 그는 인간의 아이를 길렀고, 그 아이가 17세가 되어 떠난 후에야 자신이 인간 아들을 키웠음을 깨닫는다. 돔은 비록 헤치카의 육체를 물려받진 않았지만, 성인 이전의 17년 동안 그의 삶의 일부분으로서 시간을 보냈고, 그 수련의 시간 동안 헤치카의 그늘 아래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한 후, 독립한다. 우리는 헤치카 – 돔 헤치카의 예에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눈치채게 된다. 인간의 죄, 혼란을 퍼뜨리는 인간의 파렴치한 힘, 그것은 출생과 양육, 그리고 독립이다.

어느 예술작품에서나, 그리고 당연히 현실에서도, 출산은 위대한 기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타자는 아이가 부모라는 태생적 한계를 뚫고 한 명의 독립체가 되는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출생이 위대한 것은 그것이 또 다른 자신이라는 복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피를 이어받고 나에게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이는 어느 수준까지는 나 자신의 연장선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라나면서 나와는 다른 독립된 인격체가 된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있어 아이는 기묘한 이중성을 가진 개체이다. 아이는, 스스로의 투영이기 때문에 부모의 일부이면서도, 동시에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가 혼자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한계 너머에서의 새로움의 창조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타인이다. 물론 그의 태생부터 함께 했기에 다른 타인들보다 가깝지만, 그 거리감을 제외한다면 부모와 타인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타인이면서 동시에 타인이 아니다. 게라임과 시울비가 이것을 매우 잘 보여준다.

많은 관련 증인들이 게라임과 시오크의, 흡사 대칭성으로 보일 정도의 유사성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다른 이들이 쉽게 간과하는 절대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두 사람이 가장 첨예한 대립을 펼칠 때에도 맞바람에 파랑이 이는 수면 아래에는 그 절대적인 차이가 은은하지만 분명한 저류를 형성한다. 두 사람은 부자다. 따라서 시오크는 게라임의 출생을 보지 못했지만 게라임은 시오크의 출생을 보았다. 그것이 절대적인 차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에 책임이 없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존재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대칭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게라임이 입을 연 그 순간에도 여전히 불가능했다. (24장)

물론 다른 종족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인간만큼 출산과 독립을 특별한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선 도깨비의 경우, 그들이 성을 짓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가족의 범위에 대해 느슨한 인식을 가지리라 추측된다. 도깨비들의 성은 단순히 고향의 이름일 뿐이다(4장). 레콘에게 있어 부모자식 관계는 식물의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다. 성인이 된 자식은 무관심한 타자가 되거나, 뭄토에게서 볼 수 있듯 같은 신부를 노리는 경쟁자가 된다(5장). 나가의 경우, (전작에서의 카린돌이나 나가정찰대원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출산은 인간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전작과 히베리의 통찰에서 보듯,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아닌, 가주의 자식이 된다(16장). 가주가 아닌 나가는 또 다른 자신인 아이를 가질 권리가 없다. 그리고 그나마도 성별이 남자라면, 성인이 된 후 본가를 방문할 수조차 없는, 출가외인보다 더한 이방인이 된다. 그러므로 아이를 통해 한계 너머를 엿보는 것은 다른 종족이 가지지 않는 인간만의 방식이다. 작품은 다른 어떤 종족들보다도 인간이 대를 잇는 왕위나 황위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환기한다(11장).

그러나 앞서 언급한 민들레 여단의 레콘이 그러했듯, 인간들 모두가 그 새로움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후퇴의 움직임을 시모그라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팔디곤 토프탈은 치천제를 잇는 새로운 황제로 아쉬존 토프탈을 점찍는다. 그러나 사모 페이에 감화된 아쉬존은 할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스스로를 “토프탈이 아닌 아쉬존”이라고 말한다. 팔디곤 토프탈은 자신의 일부가 미지의 지대로 넘어가는 것을 부정하고 분노와 함께 자신의 감옥에 가둔다. (완전히 동일하진 않지만, 우리는 비슷한 모습을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타르타니어스와 휘리를 통해 목격할 수 있다. 「폴라리스 랩소디」, 5장) 더 과격한 경우, 홀빈 퍼스 후작처럼 자식을, 자신을 제한하는 또 다른 한계로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식을 ‘먹게’ 된다. 그러나 게라임처럼, 비록 완전히 긍정하진 않지만,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24장)”, 자신과 다른 길을 걷는 자식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를 한계로 밀어붙일 힘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숙제를 새로운 자신에게 온전히 맡기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던 사람이다. 그는 “산다는 것은 끝이 없는 싸움이며, 모든 적을 일격에 거꾸러뜨리는 무적의 무기 따위는 인생을 우습게 만드는 태도(14장)”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것이었던 그 끝없는 싸움을 또 다른 자신에게 승계한다.

그 때 아이저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계속 돌진하거라.”

이이타는 움찔하여 아버지를 보았다. 아이저는 차분하게 말했다.

“대장군은 살육광이 아니다. 황제의 패퇴나 죽음이 기정사실이 된다면 무익한 보복에 열을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말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 규리하성을 구하는 길이다.”

똑같은 말을 명령처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저의 어투는 일선에서 물러나 조언을 하는 고문의 그것 같았다. 흥분해 있기로는 시카트와 마찬가지였지만 이이타는 어렴풋이 그것을 느꼈다. 이이타는 의혹을 느꼈다. 아이저는 혹 책임 회피를 하려는 것일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하늘치를 움직인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이타의 의심은 맞으면서 동시에 틀린 것이었다. 책임 이양과 책임 회피는 외견상으로는 똑같아 보이고 때론 구분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저의 무의식은 전자에 가까웠다. 아이저는 규리하 변경백위에 도전할 수 있는 후보자들 중에서 자신이 도태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지켜온 나날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없기에 정우에게 변경백위를 넘겨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이저는 정우가 물러난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일 거라 믿기 시작했다.

시대의 급류에서 빠져 나와 강변에 오른다. 그곳에서 젖은 몸을 말리는 동안 도통 기다릴 줄 모르는 급류는 그를 내버려두고 멀어진다. 아이저 규리하에게 일어난 일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괄하이드 규리하는 하얀 수염을 흩날리면서도 시대의 급류를 앞지를 듯이 달려갔고 죽는 순간까지 그러했다.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정신이 어떤 시대에 속하느냐의 문제다.

하늘치, 꿈, 신이 되려는 용, 환상근육.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는 시간이 그렇듯이 비가역적이다. 바뀌기 전의 시대에 속해 있었기에 아이저는 사라지는 시대와 함께 물러날 수밖에 없다. 서약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시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새로운 시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것을 자신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이타는 소리와 함께 그 투쟁에 뛰어들었다.

어느 소리? 질문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무엇이 무엇의 이름을 땄는가. 아이저는 이이타의 곁에 있는 발케네 여인을 바라보았다. 일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그 말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전체에 해당하는 표현이며, 바로 그 사실이 아이저가 사라지는 시대에 속한 인물임을 증명한다.

아이저는 이이타에게 하늘치를 줄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늘치를 손에 넣은 것은 이이타의 역량이지만 그 지점까지 이이타를 인도한 것은 아이저였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39장)

“규리하를 맡으시겠습니까?”

아이저는 발리츠나 아이넬이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이이타?”

이이타는 당혹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발리츠와 아이넬은 곧 아이저의 태도를 이해했다. 처음부터 명백한 사실이었다. 비셀스에게서 규리하를 건네받는 사람은 그녀에 필적하는 능력을 가진 자, 즉 이이타여야 한다. 비셀스는 아버지가 아니라 이이타에게 규리하를 돌려주는 것이다.

자신의 시선에도 아이저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이이타는 머뭇거리다가 정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우는 그 손을 맞잡았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이타를 향해 정우가 웃으며 말했다.

“좀 바빠서 결혼식엔 참석 못할지도 모르겠네. 급하면 누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해.”

이이타의 곁에 서있던 소리 로베자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이이타는 괜스레 제국군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사람들이 꽤 많은데 식량 같은 것은 안 보이는군. 누나가 가지고 있는 것도 그 새장뿐이고. 추적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처리해놓고 올라온 거야.”

“그럼, 알았어. 몸조심해.”

정우는 미소로 대답하고는 시카트 규리하에게 몸을 돌렸다.

시카트는 규리하가 마침내 올바른 주인을 되찾았다는 내용의 말을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정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시카트는 다시 기세를 끌어모아서 정우가 황제를 추적하는 것은 가문에 대한 배신의 죗값을 치르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말끝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시카트의 기세는 사라졌다. 시카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자를 수가 없어 애먹는 사람처럼 보였다. 눈을 깜빡거리며 시카트를 보던 정우가 말했다.

“거짓말.”

“……전에도 말했어. 누나. 거짓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거짓말은 지적하지 않는 거라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

시카트는 입을 닫았다. 정우는 마지막으로 아이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늙고 피로한 얼굴을 본 정우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올게요.”

이이타에게도, 시카트에게도, 그리고 아이저에게도 정우는 용과 싸우러 떠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지않아 돌아올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아이저는 그것이 자신감이 아니며 귀환의 의지는 더더욱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아이저는 곧 돌아올 사람에게 말하듯 말했다.

“잘 다녀와라.” (40장)

아이저 규리하는 한 인간으로서는 패배했지만, 아버지로서는 승리자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끊임없는 변화에 발맞출 힘을 잃고 정체되었고, 그래서 그 물결이 계속해서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은 강한 사람이며, 그들을 통해 그의 삶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 모습에서, 그처럼 패배했지만 승리했던 한 인물을 상기하게 된다.

문득 율리아나는 파킨슨 신부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감을 보았다. 그것은 패배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초췌함이나 비굴함으로 얼룩진 패배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싸움을 중단한 자의 눈빛이었고 몸짓이었다. 그리고 정지된 춤이었다.

“저는 이 정도까지 다다른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폴라리스 랩소디」, 20장)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알고 나면 작품의 마지막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게 된다. 치천제가 의도하는 세계는 사람의 힘이 거세된 세계이다. 사냥꾼인 아실은 사냥감인 치천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잡년아! 나는 내 아기를 가질 거야. 너는 그럴 수 없겠지?(34장)” 하늘누리처럼 “사람이 태어나지는 않고 죽기만 하는(31장)” 제국을 만들기 위해, 치천제는 태생적으로 거세된 인간을 자신의 아들이자 계승자로 삼는다. 그러나 엘시는 희대의 정신억압자인 치천제를 죽이는 여정을 떠난다. 그것은 다른 이들처럼 치천제로부터 “받아낼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엘시는 치천제를 죽이는 것 외의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녀를 죽이고자 한다. 엘시는 여전히 결정하는 자가 아니며, 그의 앞에 주어진 행동만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이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신념으로 치천제를 죽이고자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념은 가상이다. 확고한 신념은 가장 강력한 가상이다. 정우가 펼친 꿈 속에서, 그는 바우 성주와 사모 페이, 에더리 백작부인의 말을 기억해낸다. “용기를 가지고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자기 자신에게 패배”하기 위해, 그는 치천제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야 세계가, 제국이, 그리고 치천제가 준 한계 너머로 넘어가 새로움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벗어남이야말로 부모자식을 부모와 자식으로 만들어주는 것임을 안다. 엘시가 치천제의 한계 안에만 머물러 있을 때, 그는 그녀가 만든 제국이라는 농장의 한 마리 가축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그녀에게 죄를 저지를 때, 그는 비로소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는 한 명의 아들이 된다. 그리고 반대로 엘시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라세는 드디어 불임의 저주에서 벗어나 아들을 낳은 한 명의 어머니가 된다. “엘시 에더리, 신의 아들, 하지만 신에게 죄를 저지른 자”라는 표현은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다. “엘시 에더리, 신에게 죄를 저지른 자, 그래서 신의 아들이 된 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된 라세는 다의성의 높은 하늘에서 일의성의 평면적인 대지로 그를 돌려보낸다. 그 대지 위에서, 이제 막 성인이 된 엘시는, 항상 인간의 죄를 원해왔고 자신의 아이를 낳길 바라왔던(2장) 정우와 함께, 언젠가 또 다른 새로움이 될 아이를 낳을 것이다.(41장)

어디에도 없는 신이 준 선물은 나늬이다. 나가, 레콘, 도깨비의 신이 자신의 종족에게 준 선물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나가의 이름, 레콘의 무기, 도깨비의 불은 그들이 가상이라는 한계를 돌파하는 고유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나늬가 누구이며, 인간이 자신의 가상을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데에 어떠한 도움을 주는가? 나늬는 인간 여성이고, 전작을 읽어본 독자가 알 수 있듯 “미모를 통해서든 달리기를 통해서든(「눈물을 마시는 새」, 16장)”, 사람을 따라오게 만든다. 우리는 단순하게 나늬가 ‘원래 그렇기 때문에’ 인간 여성이고, 사람들을 따라오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의 시각이다. 나가가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육체를 버리고, 레콘의 무기가 부숴지며, 도깨비의 불이 열을 잃어버리는 「피를 마시는 새」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그리고 어떤 행동이 나늬와 같은 효과를 발생시키는가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살펴본 “인간의 죄”에 비춰볼 때, 필자는 나늬의 정체는 바로 어린 인간 여자아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 소녀가 나늬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건 달리기건 간에 어린 아이는, 사람들의 눈길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어른들이 가지 않은 곳을 넘치는 생명력을 가지고 인도하는 존재. 작품 내에서 나늬를 연상시키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아이 같은 성격을 가진다. 전작의 데오늬 달비, 쟁룡해에서 레콘들 사이를 누비던 아실, 야리키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세레지, 그리고 정우의 공통점은 바로 그 아이 같은 발랄함이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 그런 힘은 사라진다. 하지만 여자 아이는 남자 아이가 가지지 못하는 재능이 있다. 또 다른 나늬가 될 수 있는, 자기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이기도 한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재능. 나늬에 대비되는 보늬는, 바로 어린 아이를 낳은 어머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보늬와 나늬는 시간이 맺어주는 자매인 것이다.

11. 우리가 일평생 나눠야 할 것은 증오다 – 영원회귀

끝이 거의 다 와가는 지금, 우리는 이 글의 전반부에 제기한 모순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주로 두 번째 모순, 즉 자기 유지를 통해 자기 자신을 예속하게 된다는 모순에 대해 다루었다. 우리는 자기 유지라는 개념 자체가 가상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가상이 또 다른, 새로운 가상으로 인도하는 힘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가상을 깨고 나감으로써, 만물을 변화시키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위의 분석을 통해 가상이라는 한계를 돌파하는 각 종족의 방식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 인식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새로움을 주는 대상은 물론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서로를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서로를 변화시키는가? 아실이 지적하듯, 우리는 “대등한 상대를 죽인다(34장).”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모순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먹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를 다시 치천제의 해답으로 이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번째 모순에서 한 것과 비슷한 방식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유지’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봄으로써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먹기’의 개념에 대해 재고함으로써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먹기’는 파괴행위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테마를 타자의 처녀작인 「드래곤 라자」에서 본 바 있다.

“우리들이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파괴입니다. 상대에 대한 적극적 파괴행위지요. … 이 점에선 사랑과 증오는 거의 같아요. 어쨌든,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니까요.” (「드래곤 라자」, 13장)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존재자를 ‘먹는’ 것이 항상 부정적인 결과만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사람의 상호작용은 모두 ‘먹기’, 즉 파괴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자기 정체성은 가상이다. 그러나 가상은 사람을 제한시킬 수도, 새로운 가상으로 인도할 수도 있는 이면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먹기 역시 이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작품이 제시하듯, 먹기는 ‘싸기’를 담보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싸기의 결과물은 절망한 시울비의 말처럼 “먹을 수 없는 배설물(38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싸는’ 행위에는 낳는 것도 포함된다. 자신의 분변으로 사람을 만들고 싶어하던 엘시는, 작품의 마지막에서 인간의 죄를 저지르고 정우와 함께 자신의 아이를 만들 것을 예고한다(11장, 41장). 먹기와 싸기는 창조행위의 단계적 구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새로운 가상을 만들어냄을 통해 기존의 가상을 부수고 그 한계를 돌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그러한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를 먹음으로써, 서로가 유지하고 있는 가상을 적극적으로 파괴함으로써,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가상을 싸냄으로써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먹기는 거부해야 하는 부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권장되어야 하는 긍정적인 행위가 된다.

동일자에게서 벗어나 있고 부정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차이들을 불러들이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가장 큰 위험은 아름다운 영혼(belle–âme, 헤겔이 낭만주의자를 이르던 표현인 schöne Seele의 번역어. 잘못된 현실을 비난하고 고고한 이상에 머물지만 정작 그 현실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잊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원래는 낭만주의자 실러의 용어이다 – 역자 주)의 표상들로 전락하는 데 있다. 그것은 피 흘리는 투쟁들과는 거리가 먼 차이, 서로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는 차이들에 그치고 마는 위험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대립하지 않는다…….” 또 문제라는 기초개념은 – 우리는 앞으로 이 개념이 차이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아름다운 영혼의 자양분인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문제와 물음들뿐이다…….” 하지만 문제들은 각각의 고유한 실증성의 등급에 도달할 때, 그리고 차이가 그에 상응하는 긍정의 대상이 될 때, 어떤 공격과 선별의 역량을 분비한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문제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동일성을 박탈하고 그의 선한 의지를 깨뜨리는 가운데 그 영혼을 파괴하는 힘을 낳는다. 문제틀과 미분적 차이가 규정하는 어떤 투쟁과 파괴들, 이것들에 비추어 보면 부정적인 것의 투쟁과 파괴들은 외양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영혼들의 경건한 소망들도 마찬가지로 겉모습에 사로잡힌 신비화에 지나지 않는다. 허상은 모상(模像)이 아니다. 허상은 원형들마저 전복하는 가운데 모든 모상들을 전복한다. 즉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머리말)

낭만적이고 비폭력적인 태도, 즉 (위의 인용에서 “아름다운 영혼”이 할 만한)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태도, 서로를 존중함으로써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예의 바르지만 사실은 무관심한 태도야말로 공격의 대상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상대를 침략함으로써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지멘이 이를 가장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너는 물구덩이를 증오하고 붙잡힌 자신의 상황을 증오하고 무기력한 나를 증오했다. 그 증오로 너는 나를 이끌고 거기를 벗어났다.”

“증오가…… 그건 증오가……”

증오였어. 너였어.”

“내 소망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황제와 제국을 증오했지.”

아실은 신음하며 죽어가던 즈라더를 떠올렸다. 즈라더는 그녀에게 자신과 황제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했고 아실은 즈라더에게 싫어하는 것과 증오하는 것의 차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황제를 증오했다. 지멘이 말했다.

“너는 분리주의의 숨은 전제가 사람들이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정말 자신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러려면 사람들은 서로를 증오해야 할 것 같아. 왜 그러냐고 묻지는 마. 내가 느끼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냥 레콘의 감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지멘은 자신에게 짓눌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망치를 힘있게 부여잡았다.

“나는 네 증오를 되찾을 거야. 반드시.”

“반드시?”

“그래.” (41장)

“이제 그들의 배례의 주이자 증오의 주가 된 나는 아마도 그녀에게 판데모니엄의 지배자가 받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주겠지요. 그 고통 속에서 미쳐버려 영원히 비명을 지르고 인간을 동정한 자신을 되풀이되풀이 죽이게끔 할 겁니다. 자살은 그녀의 삶이 되겠지요.”

율리아나는 숨이 멎는 기분 속에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승리자가 아니군요.”

“아니오. 승리자입니다.”

“어째서?” (「폴라리스 랩소디」, 23장)

지멘이 사람의 증오를 되찾으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치천제는 이라세오날의 사자를 통해 사랑을 전파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이너 카쉬냅이(혹은 라수 규리하가) “상냥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모든 사람이 서로를 깔보는 마을(4장)”이라고 말한 것처럼, 사랑과 상냥함은 사람을 정체(停滯)시킨다. 우리는 그러한 정체에 반항하고, 그것을 공격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를 적극적으로 파괴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먹어치워야 하는 부분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 사람이 붙들고 놓지 못하는 울타리 자체를 부숴야 한다. 이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자살이지만, 거듭 새로운 자신을 탄생시키는 자살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정수이다. 

니체의 비밀, 그것은 ‘영원회귀’란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중으로 선택적인 것이다. 우선 첫 번째로 그것은 사유로서 선택적이다.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모든 도덕으로부터 해방된 의지가 자율에 이르기 위한 법칙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의욕하든(예를 들면, 나의 게으름, 탐욕, 나의 비겁함, 나의 악덕과 미덕), 나는 그것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도 또한 의욕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욕’해야만 한다.’ … 그리고 ‘영원회귀’는 선택적인 사유일 뿐 아니라 또한 선택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단지 긍정만이 회귀하는 것이며, 긍정될 수 있는 것만이 회귀하고, 기쁨만이 되돌아온다. 부정될 수 있는 모든 것, 부정인 모든 것은 ‘영원회귀’의 운동 자체에 의해서 제거된다. ‘존재’는 생성으로부터 긍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긍정에 반대하는 모든 것과 니힐리즘과 반동의 모든 형태를 자신으로부터 쫓아내 버린다. (「들뢰즈의 니체」, 질 들뢰즈, 2장)

우리의 파괴 대상, 먹기의 대상은 선택적이다. 조금 더 위의 인용에서, 들뢰즈는 “차이를 긍정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할 때, 긍정되는 차이는 공격적이고 선별적”이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니체의 말대로, “영원히 회귀할 만한 것, 긍정될 수 있는 것만이 회귀”되어야 한다. 니체가 말하는 “회귀”는 우리가 이제까지 말해온 “변화”와 같은 말이다. 니체가 굳이 “회귀”라는 말을 쓴 이유는, 그가 기독교적 혹은 다의적 세계관의 시간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다의적 세계관은 존재자가 아직 달성하지 못한 목표, 즉 본질을 가정하기 때문에, 모든 변화는 그 목표를 향한 진전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시간은 그 목표를 향해 흘러간다. 우리는 ‘언젠가는’ 그것을 달성하는 여정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존재는 일의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끝이 정해져 있는 역사의 중간에 끼여있지 않다. 시간은 비가역적이고,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반복되는 것이다. 시간처럼 영원히 반복되기만 할 뿐이기에 영원회귀라고 정의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시시한 것들(4장 등)”은 거부되고 공격대상이 된다. 그리고 영원히 변화할 자질이 있는 것들만 긍정되고, 그러한 것들만 의욕해야 한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말할 때, 추구되는 것은 권력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권력과 힘의 차이를 분명히 안다. 권력은 변화하고자 하는 힘을 한계 속에 가두어 두려는 것이다. 반대로 힘은 시간과 함께 만물을 변화시키는 발산적 원리 자체이다.

12. 생의 심오한 의문 대한 대답 – 「피를 마시는 새」가 말하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우리가 제기한 두 모순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파괴행위인 ‘먹기’를 중지할 것인가? 중지할 것이 아니라, 먹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새로운 모습으로 ‘싸는’ 방식으로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 먹기와 싸기는 선별적이어야 한다, 즉 다른 사람의 현재 모습에 잠재되어 있는, 일의적 존재가 가지는 변화시키는 힘을 현실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가상인 자기 정체성에 예속되지 않을 것인가? 가상에 감추어진, 가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변화시키는 힘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가상을 만들어내면 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새로움을 잃고 우리를 옭아매는 한계가 되어버린 가상을 파괴한 후, 그것을 딛고 만들어낸 새로운 가상 위에서 살아간다. 주퀘도 사르마크의 말대로, “세상은 바보들의 시체 위에 서 있다(7장).” 그러나 그 시체는 한때 현명했던 자들의 시체이다. 지금 그 위에 서 있는 현자들은 언젠가 생명력을 잃고 바보들이 되며, 결국 새 시대의 현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들의 토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끊임없는 세대교체, 가상의 생성과 파괴의 무한한 연쇄는 다른 사람을 먹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먹힘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이는 신이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엄격한 윤리이다.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도덕은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람이 창조해내는 윤리는 매번, 매 경우, 매 시간마다 좋은 결과, 즉 새로움을 발생시킬 방법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신이 약속하는 궁극적 목표가 있기에, 신의 도덕은 그 행동에 대한 보답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세계엔 궁극적인 목표 따위는 없으며, 영원회귀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람의 윤리는 행동 자체를 그 보답으로 여긴다. 이러한 시각을 가질 때, 우리는 가이너 카쉬냅이 제기하는 삶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그 희망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생에는 의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 어떤 지혜로운 자에 의해 그 의문이 풀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자는 그 때부터 의문 없는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전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생이다. 의문 없는 생이 생일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설명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 혹은 그 지혜로운 자가 사기꾼이라는 것.

우리의 현명함을 포기할 수 없기에 전자를 선택할 수도 없고 우리의 멍청함을 강조할 수 없기에 후자를 선택할 수도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둘 모두를 끌어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전제는 정확하며, 사기꾼은 사기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서문. (18장)

그 전제가 정확하고 사기꾼은 사기꾼이 아니라면, 도출되어야 하는 결론은 간단하다. 의문에 대한 해답이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끝이 정해져 있어, 풀고 나면 그 이후가 덧없어지는 궁극목표는 아닐 것이다. 사르마크 부인이 말하듯, “시간은 시간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28장).” 역사의 행보에 작용하는 힘들은 어떤 정해진 계획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역사는 기독교적이거나, 헤겔적이거나, 마르크스적인 역사이다. 즉, 존재론적 다의성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끝이 있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간은 끝없이 흘러가기를 반복할 뿐이다. 출판된 책의 속표지에는 기하학적 형상이 권마다 증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형상은 드래곤 커브라고 하는 것인데,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마틴 가드너라는 수학자가 발표한 프랙탈 도형의 하나이다. 프랙탈 도형이 다 그렇듯, 드래곤 커브의 핵심은 반복에 있다. 단순한 긴 띠 모양의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편 후에 세로로 세우면 직각을 이루는 두 선 모양이 된다. 그러나 종이를 두 번, 세 번, n 번을 접은 후 세우면 마치 드래곤(필자의 눈에는 해마처럼 보이긴 하지만)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여기에서 이 모양을 발생시키는 근본적인 원리는 바로 반복이다. 타자가 드래곤 커브를 통해 암시하고자 하는 점은, 시간이 바로 모든 존재자의 발생의 근본적인 원리이며, 이 시간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의적 세계의 시간이 끝을 향한 육박임에 반해) 반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이야말로 존재론적 일의성의 세계, 니체의 영원회귀가 전제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만 하는 완전성, 이미 예비되어 있어서 아직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를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그런 완전성은 없다. 불완전성이 없기 때문에, 존재의 평면에서 발생한 만물은 모두 완전하다. 단지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존재의 힘, 즉 새로움을 만들어내고 변화할 수 있는 힘을 더 많이 발휘할 수록, 우리는 더 강하고 더 큰 정도로 완전하다. 따라서 우리의 해답은 궁극적이라기보단 실시간적이다. 더 많은 것을 창조하고, 창조된 것이 다시 더 많은 것을 창조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노력하는 것.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 손에 쥐어진 한낱 가상을 놓지 못하고 그것에 예속되는 약자가 되는 대신, “매 순간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강자가 되는(「눈물을 마시는 새」, 14장)” 것. ‘탁월한’ 본질에 비해 필연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우리 존재자의 불완전성에 슬퍼하는 대신, 우리 아래에 잠재되어 있는 창조적 능력을 즐기고 그 창조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지복이고, 니체의 영원회귀이며, 「피를 마시는 새」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엘시와 정우가 만들어내길 기대하는 웃음의 세계이다.

13. 못 다한 이야기들

이번 장은 필자가 언급하고 싶었지만 글 속에 적절하게 녹여내지 못한 사항들, 그리고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작품 주제와 분명히 관계가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한 소재들에 대한 부분이다. 그런 만큼 파편적일 수도 있고, 불필요할 수도 있다.

13.1. 원시제 – 삶의 옹호

보통 독자는 사모와 치천제에서 비춰지는 원시제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제국을 통해 “사람이 고상해질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30만 년에서 만 육천 년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파편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원시제의 과거 발언을 살펴보면, 적어도 원시제의 목표가 치천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사람을 한계 짓고 그들에게 본질을 부여하려는 치천제와는 달리, 원시제는 “결코 자신을 명제로 만들지 말라(39장)”고 말한다. 명제는 정의(定義)이며 언어화이다. 원시제는 그러한 한정 짓기에 반해, 삶의 창조력을 옹호한다. 이미 말했듯, 그녀가 “삶은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패배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13장)”고 말하는 이유도 삶이 가지는 창조적 힘을 추동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외전에서 이라세오날이 정신억압을 깨우친 것을 본 원시제가 느끼는 기쁨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주인의 의도대로 자라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쉽게 가축화될 수 있는 용이, 주인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생명의 힘을 발현시키는 장면이다. 이 때 그리미가 이라세오날에 대해 어머니의 기쁨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무리한 가설은 아니리라.

따라서 그녀가 제국을 만든 것은 결코 사람을 가둬놓기 위한 울타리로서가 아니다. 제국은 일차적으로는 공간의 창조이다. 만물을 포괄하는 하나의 공간 위에서, 모든 사람들은 서로 먹고 싸기 위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유료도로당에서 비슷한 사상을 발견하지만, 작품 속에서 유료도로당의 그 목표가 원시제를 통해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제국은 그 자체로 모든 사람이 돌파해야 할 한계로서 나타난다. 제국이라는 새로운 정체(政體) 역시, “죽은 자의 자손(외전)”으로 태어난 그리미가 창조해낸 가상이며, 따라서 당연히 새로운 가상을 위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국을 영속적인 건축물로 만들고자 하는 치천제보다는, 눈에 그대로가 아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잠재성이 있는 ‘무엇’(20장)”으로 여기는 홀빈 퍼스가 원시제의 적실한 사상적 적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2.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만들어버리는 것 – 수적 구별

그을린발은 독보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레콘이다. 실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레콘의 종족적 특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 외에도 그는 독특성을 찾아내는 것에 매우 능하다. 코끼리에 대한 그의 애정이나 그가 그의 특이한 무기인 무차별학살을 고안한 방법 등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베로시에게 한 말이야말로 무엇보다 작품의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바로 뒤에 서술될 베로시의 개성과 함께 본다면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베로시에게 한 그의 말을 살펴보자.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두 번째 요구였어. 세 번째 요구를 암시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 두 번째 요구라는 놈 말이야. … 두 번째 요구 자체가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아아. 왜 세 번째뿐만이 아니라 첫 번째도 내포하냐고? 하나밖에 없을 땐 처음이라고 하지 않아. 그냥 하나지. 심지어 하나라는 말조차 생략할 때가 많아. 베로시 토프탈이 하나라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두 번째가 있을 때만 첫 번째가 만들어지는 거야. 두 번째는 그렇게 위험한 거지.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넌 그걸 했어. 그러니 네 보증은 무의미해.” (28장)

우리는 이 글의 초반에서 샛별과 개밥바라기의 예를 통해 차이를 인식하는 두 가지 방법을 알아보았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를 본질의 관점에서 구별할 때, 우리는 그 둘의 차이가 서로 다른 본질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본질에 의해 발생하는 차이를 우리는 보통 종차(種差)라고 한다.(필자가 설명을 너무나 간략화한 것이긴 하다) 두 대상의 본질이 다르다면, 우리는 그 둘의 차이를 본질을 통해 쉽게 인식한다. 예를 들어 인간과 침팬지는 매우 유사하지만, 분류에 따르면 그 둘은 속(屬genus)에서 구분된다. 그들은 공히 인간과(科)에 속하지만, 인간은 인간속임에 반해 침팬지는 침팬지속이다. 따라서 인간과 침팬지는 인간과라는 유(類)개념과, 인간속 – 침팬지속이라는 종(種)개념, 그리고 생물학적 차이라는 종차를 가진다. 우리의 예시를 다시 사용하자면,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금성이라는 유개념을, 샛별 – 개밥바라기의 종개념, 그리고 출현시기라는 종차를 가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본질을 가진 두 대상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두 대상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예를 들어 우리 눈 앞에 인간 두 명이 있을 때, 둘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 경우에 우리는 본질을 통한 구별 즉 종차를 적용할 수 없다. 오히려 이 경우에 본질은 두 대상이 공유하는 배경의 역할을 한다. (어쨌든 공통점이 아예 없는 대상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북이와 명예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공유할 배경이 없는 차이는 곧 무차별성indifférence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무차별성을 흰 무無라고 지칭한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1장)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내적으로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그들 간의 차이는 본질의 바깥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곧 질료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료적 차이를 인정할 때, 우리는 동종의 대상들을 숫자에 의해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수적 구별’이라고 한다.

수적 구별은 불가피한 것인가? 우리가 본질의 관점에서 대상을 구별할 때, 즉 존재가 다의적이라고 가정할 땐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를 정의하는 또 다른 방법을 알고 있다. 존재가 일의적일 때에도 수적 구별이 불가피할까? 존재가 일의적인 세계에서, 어떤 규정된 의미를 가지고 미리 존재하는 존재자는 없다. 오히려 ‘있다’라는 의미만을 가진, 어떤 규정도 주어지지 않은 바탕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 바탕에 어떤 규정이 주어지면 그제서야 한 존재자가 바탕과의 차이를 발생시키면서 바탕으로부터 뛰쳐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는, 바탕이 되는 ‘있다’라는 하나의 의미를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없다. 존재 자체가 ‘있다’라는 규정을 제외하고는 무규정적인, 차이 만으로 우글거리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존재자는 순수한 차이인 존재에 일정한 금(규정, 한계, 본질 등)을 그어 발생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차이가 규정에 앞서는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는 그 바탕은 물론 그로부터 다른 존재자들과도 다르며, 결국 수적 구별은 불필요해진다. 모든 존재자가 독특한데, 수적인 구별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을린발이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수적 구별과 독특성이 각각 서로 배타적인 기반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방식, 혹은 레콘의 방식은 독특성을 중시하는 존재론적 일의성의 관점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너희들의 방식”, 즉 인간의 방식은 같은 본질을 공유하는 ‘수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자들’이라는 개념을 허용하는, 존재론적 다의성의 관점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귀찮게 하는 요구들을 없애기 위해, 그을린발은 베로시 토프탈과 본질을 공유하는 자들, 즉 “대호왕 사모 페이와 시모그라쥬공, 그리고 토프탈의 이름을 쓰는 모든 녀석들과 그들의 친구들(28장)” 전부를 없애기로 하는 것이다.

13.3. 두억시니와 꿈 – 바탕, 시뮬라크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베로시 또한 일의적 존재에 대해 어렴풋한 통찰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두억시니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에 두억시니 장군이라는 별칭을 가진다. 그런데 두억시니에 대한 그녀의 고찰은 우리에게 익숙한 느낌을 준다.

두억시니는 혼란이다. 두억시니는 귀납법의 적용을 거부한다. 모든 두억시니는 모든 두억시니와 다르며 그렇기에 그것이 두억시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을 잃은 이 가련한 종족은 보살펴줄 어떤 법칙도 가지지 못했기에 아무렇게나 존재한다. … 단어에는 지시 대상이 따르는 법이지만 두억시니의 경우에는 그 방식이 독특하다. 두 사람이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비록 그 털빛이나 크기 같은 것은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동물적이라는 말은 고양이라는 말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도덕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동물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은 상대편이 기민함과 직관적 행동에 대한 이야기로 잘못 이해하는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약간의 오해를 조정할 수 있다면 동물적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있고 실제로 사용된다. 두억시니에 이르면 그 단어의 지시 대상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두억시니는 이렇다, 혹은 두억시니는 저렇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두억시니는 모든 두억시니와 다르므로. … 두억시니에게는 어떤 규칙도 없다. 그것은 숲 속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일지도 모른다. 발에 부딪히는 돌멩이였을지도 모른다. 불가능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두억시니에게는 규칙이 없는데. … 사고가 그 지점에 도달하면 베로시는 늘상 가슴이 쿵쿵 뛰곤 했다. 실재의 수수께끼를 살살 건드리고 있는 듯한 아스라한 고양감. (11장)

모든 두억시니는 모든 두억시니와 다르며, 그들에게는 규칙이 없다. 그들은 애초에 특정한 규정, 정체성, 본질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차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대상들 사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차이(이러한 차이로는 위에서 알아본 종차, 수적 구별에 의한 차이 등이 있다. 이들 외에도 유비를 통한 차이도 있지만, 지금 이 글에서 그것은 생략하기로 하자)를 대자적(對自的) 차이라고 한다. 반면 두억시니처럼, 혹은 더 위에서 살펴본 바탕으로서의 일의적 존재처럼, 다른 어떤 대상 사이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발견되는 차이를 즉자적(卽自的) 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베로시는 두억시니를 통해서 존재의 일의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가 작품에서 묘사한 두억시니처럼, 존재의 일차적 상태인 즉자적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가 사용한 개념으로는 시뮬라크르(simulacre)도 있다. 시뮬라크르란 무엇인가? 리오타르의 사용 방식이 유명하기 때문에 그것은 ‘원본보다 더 현실적이며, 그래서 그것을 발생시킨 원본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치는 사본’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어디까지나 그의 존재론적 일의성의 시각에서 해석되는 개념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존재론적 다의성을 무너뜨리는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역설적이게도 다의적 존재의 비조라 할 수 있는 플라톤로부터 찾을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본질 즉 이데아의 세계가 실존하는 존재자에 선행한다. 이데아야말로 질료라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본질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서상 이데아가 일차적이며, 자신의 본질을 나누어받는 현실에 실존하는 존재자는 이차적이다. 그리고 이차적인 현실의 모방(미메시스라고도 한다)인 예술은 모방의 모방이기 때문에 삼차적이며, 따라서 그만큼 이데아와도 멀어진다. 플라톤이 예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이것이다. 진리의 기준이 이데아이므로, 존재자들의 진리치는 누가 더 이데아에 가까운가로 결정된다. 플라톤의 예를 사용하자면, 누가 더 뛰어난 낚시꾼인가는 낚시라는 이데아를 누가 더 잘 나누어받는가로 결정된다. 따라서 이데아를 잘 나누어받을 ‘자질’이 중요하다. 이데아를 나누어받을 자질을 더 많이 갖출수록 더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이데아를 받아들이는 존재자들 사이에는 이데아에 의한 내적 공통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위에서 수적 구별에 대해 알아볼 때 내적 동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지적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데아를 받을 자질이 일절 없는, 순수하게 거짓된 존재자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인간성이라는 이데아를 절대로 나누어받을 수 없는 존재자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는 내적으로는 인간과 절대 공통성이 있을 수 없다. 외적으로, 즉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아무리 인간과 유사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인간이 아닌 무언가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본질이나 규정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개념을 발생시켜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발산적인 존재자이다. 플라톤은 이 시뮬라크르를 항상 진리로부터 비껴나 있는, 절대 참될 수 없는 악마적 존재로서 정의하지만, 플라톤 자신이 제시한 이 개념이 우리에겐 플라톤주의를 역전시키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어떠한 규정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순수한 차이를 담지하는 존재자,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존재자와도 같지 않은 독특성을 가지는 존재자. 역동적인 발생의 반복을 통해 정적인 규정으로부터 항상 벗어나는 존재자. 두억시니는 일의적 존재의 알레고리이면서, 동시에 들뢰즈의 시뮬라크르의 직접적인 비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작품 안에서 여러 단서들을 통해 이러한 시뮬라르크 개념이 단지 두억시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괄하이드와 라수의 대화를 통해 이것을 더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다.

“라수. 제국은 두억시니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
”아아. 그건 사람은 두억시니라는 뜻이야.” (33장)

꿈이야말로 사람이 두억시니적인 존재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정우에 의해 꿈이 현실과 부딪힐 때, 우리는 긴 시간 동안 학습을 통해 가꿔온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37장)”이 꿈에 의해 깨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꿈은 한 인물의 정체성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방식(「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라말의 말처럼, “꿈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37장).” 그것은 단순히 현실의 수면 위로 올라옴으로써, 현실에서 이미 잘 구획되어 있는 정체성과 가상들을 자신의 ‘즉자적 차이’를 통해 순식간에 흩어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바탕이 표면으로 올라올 때, 인간의 얼굴은 분해된다. 미규정자가 보통의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규정 – 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규정 – 안으로 혼융(混融)되어가는 그런 거울 안에서 분해되는 것이다. 괴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이상야릇한 규정들을 집적하거나 동물을 중층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바탕을 상승하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1장)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견고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치천제, 아트밀 등)일수록 더 큰 타격을 받는다. 반대로 발생적인 힘을 가지지 않는, 그래서 치천제의 비유처럼 움직이는 바위(12장)나 (좀 더 현시대적인 비유를 하자면) 잘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엘시는 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작품에는 엘시가 기계처럼 잠을 자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일하는 장면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13.4. 바둑 – “매끈한” 평면의 공간

우리는 바둑판에 대해서 이미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바둑판은 수직적 높이를 전제하는 존재론적 다의성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평면의 공간, 존재론적 일의성의 공간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지적하는, 타자가 참고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들뢰즈의 텍스트를 간단히 발췌하도록 하겠다.

이에 비해 바둑은 작은 낱알 아니면 알약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단순한 산술 단위에 지나지 않으며, 익명 또는 집합적인 또는 3인칭적인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며, 그것이 한 명의 남자나 여자 또는 한 마리의 벼룩이나 코끼리라도 상관이 없다. 바둑알들은 주체화되어 있지 않은 기계적 배치물의 요소들로서 내적 특성 같은 것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직 상황적 특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말끼리의 관계도 장기와 바둑은 완전히 다르다. … 바둑알은 오직 외부성의 환경만을, 즉 일종의 성운이나 성좌를 가진 외부적인 관계만을 구성하며, 이들 관계들에 따라 집을 짓거나 포위하고 깨어버리는 등 투입 또는 배치의 기능을 수행한다. 바둑은 단 한 알로도 공시적으로 하나의 성좌 전체를 무효로 만들 수 있는 반면 장기의 말은 그렇게 할 수 없다(또는 통시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펠릭스 가따리, 12장)

바둑의 경우에는 열린 공간에 바둑알이 분배되어 공간을 확보하고 어떠한 지점에서도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둑알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는 끝없는 되기(=생성)이다. 바둑의 “매끈한” 공간 대 장기의 “홈이 패인” 공간.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펠릭스 가따리, 12장)

13.5. 돈 – 돈에게 창조적 측면이 있을까?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이 글에서 돈과 자유무역당에 대해 분석할 수 없었던 것이 매우 아쉽다. 돈은 작품의 주제와 너무나도 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정우와 만난 자유무역당원의 말에서 그것을 눈치챌 수 있다.

“돈이라는 것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을 교환할 수 있게 하는 약속된 교환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언어와 같습니다. 언어도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할 수 있게 하는 약속된 교환가치입니다. … 국가가 조세권을 가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국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일정 부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이 특정 국가의 국민이라는 생각 정도는 강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통제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한 통제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필요하겠지만, 언어는 강제징수할 수 있는 품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언어 대신 세금을 걷는 것입니다.” (24장)

언어가 강력한 중립화 기제이자 가상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아보았다. 자유무역당원의 인용된 말은 돈 역시 언어와 같은, 사람을 제한하는 한계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돈 역시 법처럼, “밖으로 나아가는 대신 안으로 한계 짓는(41장)” 기제인 것이다. 그러나 법은 다른 가상들처럼 이면성을 가진다. 안으로 한계 짓는 측면은 법의 사법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법이 입법성 역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입법성을 통해, 우리는 기존의 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예외적 현상을 건져낼 새로운 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언어 역시 언어예술인 문학을 통해 기존의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감각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돈 역시 이러한 창조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가? 돈이 사람을 한계 짓는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돈의 소위 사법적 측면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피를 마시는 새」는 우리에게 돈의 입법적 측면을 제시하고 있는가? 엘시가 엔거 평원에서 제국의 몸값을 물으며, “아라짓 제국은 우리가 산다(31장)”고 외칠 때, 그는 돈의 창조적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아직 잘 모르겠다.

13.6. 레콘의 힘 – 경제학적 분석?

필자는 「피를 마시는 새」의 철학적인 주제에 집중하여 분석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 항상 그렇듯 우리는 다른 측면으로 작품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원시제의 통치 하에 아라짓 제국이 「눈물을 마시는 새」에 비해 너무나도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단 반 세기라는 기간 동안(원시제 통치 시기만을 따지면 단 12년에 지나지 않는다)의 작품 내 인구수 변화이다. 우리는 헤치카와 아실의 대화 속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헤치카는 “원시제가 제국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5장)” 레콘의 인구수가 전에 비해 크게 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페르낭 브로델에 의하면 인구수는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브로델은 프랑스의 역사학자로, 사건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역사를 분석한 아날 학파의 일원이다. 주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브로델은 13세기에서 산업혁명 이전의 18세기까지 전세계 인구수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인구수가 잘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히 말하자면 그 당시의 생산기술(주로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축산업의 생산기술)이 유의미하게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기간 동안 유럽의 밀, 아시아의 쌀, 아메리카의 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생산량이 변화를 느끼기 힘들 정도로 매우 느리게 증가하기 때문에(브로델은 이렇게 한 문명에서 매우 느리게 변화하는 사회적 요소를 장기지속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인구수가 식량을 초과하면 필연적으로 인구 당 식량의 비율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시기마다 인구수를 감소시키는 사건이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14세기에는 유명한 흑사병이 있다. 흑사병은 그 자체로도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하지만 14세기는 인구수가 식량 생산을 초과한 시기이고,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들의 면역력이 약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즉 질병이 인구수를 조절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흑사병만큼 극적이진 않아도 인구수를 조절하는 다른 기제가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 전쟁과 같은 것 말이다.

그러므로 원시제 치하에서 인구수가 큰 폭으로 증가하기 위해선, 그 인구수를 감당할 만한 생산기술의 발전이 병행되어야 한다. 헤치카가 “원시제가 제국을 잘 다스렸다”고 말할 때, 이 “잘”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식량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산업혁명에 준할 만한 계기는 무엇인가? 아마도 레콘의 집단화가 그 답일 것이다.

집단화된 레콘이 뿜어내는 가공할 힘은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아스캄 영지의 성채매장자는 유머러스한 예일 뿐이다. 집단화된 레콘은 2년 만에 16킬로미터의 터널을 팔 수도 있고, 단기간에 운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두 개의 예는 레콘이 제국의 유통과 농업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준다. 집단화된 레콘이 미개간지를 개척한다면 그 땅에서 얼마나 많은 식량이 생산될 것인가?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헬기를 통해 농약을 뿌리는 미국의 대규모 농업처럼, ‘날듯이’ 뛰어다니며 비료 따위를 뿌리는 레콘들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분석이라기에도 민망한 상상 역시도 「피를 마시는 새」를 즐기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14. 끝

이 글은 원래는 각 장의 제사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석하기 위한 글이었다. 인용 중에 특히 제사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필자가 의도했던 또 다른 목표가 있었다면, 그것은 수 년 전 필자가 썼던 ‘「눈물을 마시는 새」를 분석해보자’라는 글에 스스로 반박하기였다. 필자는 당시에 헤겔의 시각으로 「눈물을 마시는 새」를 읽고자 했다. 바로 다음에 썼던 ‘「피를 마시는 새」를 분석해보자’라는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글을 스스로 반박하긴 했지만, 그것을 좀 더 명확히 하고자 분량이 더 긴 글을 다시 쓰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타자의 작품은 들뢰즈의 철학에 입문하기에 굉장히 좋은 계기라 생각한다. 이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

by 데오늬달비 | 2019/09/12 08:56 | book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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